이종미

거울을 닦으며


음력 구월도 중순으로 치닫건만 가을볕이 따갑다. ‘시아버지 수염 밑에서도 피할 수 있다’는 가을비라도 한 차례 내려야 낮 기온이 떨어지려나 보다. 점심을 단숨에 비운 아이들이 땀범벅 머리칼을 날리며 미끄럼틀로 달려간다. 씽씽 더운 바람을 가르며 내달리는 아이들과 교정 한가득 봉긋봉긋 노랑꽃망울 터트리는 국화꽃이 뒤섞여 마치 동화책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나도 같은 쪽수의 책장으로 걸어 들어간다.  

미끄럼틀 앞에서 주춤거리며 폴짝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예전과 달라진 뭔가를 발견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다. 봉을 붙잡고 나무 타듯 올라가는 아이, 줄을 잡고 발바닥 힘으로 버티며 오르는 아이, 밑에 있는 아이가 안아주면 먼저 올라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오르는 아이 등. 교실에서는 차분하게 날개 접은 앵무새 같더니 놀이터에 나오니 훨훨 나는 참새도 부러워할 지경이다.

남녀학생 가리지 않고 끌어주고 잡아주며, 옹기종기 모였다 흩어지는 모습을 운동장가 매실 나무들은 숱하게 보았으련만 오늘도 시원한 가을바람으로 박수친다. 의자 밑에서 구경하던 내 발도 미끄럼틀에서 뛰어내리는 아이와 동시에 움찔한다. 마음이 먼저였지 발이 먼저인지 알 수가 없다. 아이들 틈바구니로 반사하는 빛들 때문에 눈이 부시고 식곤증이 몰려와 졸음이 살살 온다.

자리를 털고 교무실로 향하는데 한 아이가 달려와 싸움 좀 말려달라고 한다. 웅성거리는 쪽으로 가보니 삽시간에 분위기가 싸하다. 평소 애교 잘 부리고 성격 화끈한 혜진이가 ‘네가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냐’는 말을 흐리며 울음을 터뜨린다. 태희를 보면서 하는 말이다. 혜진이의 들썩이는 어깨와 낮은 울음소리만 있을 뿐 침묵이 흐른다. 오늘만큼은 나도 해결사가 아닌 구경꾼이고 싶어 같이 침묵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혜진이가 눈물을 닦으며 민지 손을 잡아끈다. 그러자 5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가로막는다. 혜진이는 더 크게 운다.

언 듯 볼 때 5명이 혜진이를 왕따 시키는 듯싶다. 운동장가 시계가 5교시 수업시작 10분 전임을 알린다. 나는 계속 구경꾼이기로 작정했다. 다시 또 침묵이 흐른다. 무슨 결심이라도 했는지 제법 조리 있게 말 잘하는 태희가 나를 향해 뭔가 좀 해결해달라는 말투다. ‘친구를 거짓말로 왕따 시키는데 가만히 있겠냐’고 질문한다.  ‘아니지’하고 간단하게 대답하는 내 말을 가르며. 혜진이는 억울하다는 듯 ‘원주가 화장실에서 빵을 주워 먹고 몰래 빈봉지를 버렸다’고 소리친다. 오늘 싸움의 주인공인 덩치 큰 원주는 아무 말도 못들은 듯 눈만 껌벅거린다. 태희는 원주의 등을 떠밀며 ‘아니라’는 대답 좀 하라고 재촉하지만 원주는 ‘나만 안했으면 됐지 뭐’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민망한지 태희가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 5교시 수업을 알리는 음악소리도 같이 났다. 할 수 없이 싸움은 일단 미해결로 처리하고 다음날 점심 먹고 다시 모이자고 했다. 교실로 들어가는 등 뒤로 태희의 눈초리가 따갑다. ‘아이들 싸움 하나 해결 못하는 너는 선생도 아니다’는 느낌. 

점심을 먹고 놀이터를 나가니 어제처럼 7명이 모여 있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5명과 2명으로 나뉘어 놀지도 않고 나를 기다린다. 한 참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국화잎에 힘이 없다. 오늘따라 나도 점심을 짜게 먹었는지 확 갈증이 인다. 바라보는 아이들 곁에 다가서자 태희가 민지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민지는 힘도 없이 끌려간다. 이번에는 혜진이가 민지를 끌어간다. 조금 전과 다르게 혜진이 쪽으로 끌려가는 민지의 발에 힘이 들어가 질질 끌린다. 끌고 당기다가 몸싸움이 일었다. 이번에야말로 ‘너는 선생도 아니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고 일단 뜯어 말린 후 진정시켰다.

혜진에게 먼저 말할 기회를 주었다. 이 싸움이 왜 생겼지요? 하고 물으니 ‘원주가 빵을 주워 먹어서 생겼다’는 것이다. 태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하자 ‘혜진이가 원주를 핑계로 민지를 빼가려고 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머지 4명의 아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온 몸으로 맞장구다. 어떻게 해결되기를 바라냐고 질문하자 혜진이는 민지와 둘이서만 따로 놀고 싶단다. 민지도 같은 의견이냐고 질문하자 민지는 ‘다 같이 놀고 싶다’고 대답한다. 순간적으로 혼자가 되어버린 혜진이는 ‘그럼 자기 혼자 놀겠다’고 선언한다. 몇 몇 아이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싸움을 종료하고 싶어 하는데 태희는 이번에도 안 된다고 막는다. 이유인즉  ‘유치원 때부터 초등3학년인 지금까지 7명이 친하게 지냈는데 혜진가 빠지면 재미없다’ 것이다. 원주가 빵을 먹었든지 아니든지 친구의 실수를 감싸 주지 못하고 발설한 혜진이도 그 말을 들었으리라. 혼자 놀겠다고 고집은 부리지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으로 볼 때 태희가 쥐고 있는 리더의 자리는 한 참 동안 지켜질 것이다.  

 이집트 벽화에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우스개문구가 있단다. 예전에 비해 지구상의 인구가 늘었으니 버릇없는 아이들도 비례하여 더 많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습된 편견과 아집으로 이 아이들을 들여다 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일이다. 싸움은 무조건 나쁘니 하지마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태희와 혜진이는 야단맞아 당연하다. 어렸을 때부터 다툼은 나쁜 것이라는 학습 결과 다음에 이어질 화해의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즉 부모님의 다툼은 봤지만 화해의 장면은 보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다툼을 터부시한 우리의 습관 때문은 아닐까.

아이들의 다툼 속에서 나를 보았다. 자존심에 금이 가는 말을 들으면 약간의 손해가 온데도, 내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져도 혜진이처럼 끝까지 고집을 피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주변에 피해를 주는 고집인 줄도 모르고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 준 자존심인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구를 되새기며 나는 오늘거울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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