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지방자치제의 역사와 민주주의

2014년 6월 4일은 전국지방선거일이다. 6번째 지방선거를 맞이하는 것이다. 지방자치의 역사는 주민들의 민주적 역량과 중앙권력과 연관이 있다. 중앙권력이 강화되면 상대적으로 지방 자치는 약화되었다. 그만큼 지방 자치는 민주주의 꽃이라 부를 만한 것이다. 2회에 걸쳐 지방자치에 대해 알아본다.

근대 이후의 지방자치제
근대적 자치제도의 시작은 갑오경장기의 자치적 제도인 향회제도가 있다. 1895년(고종 32년) 11월 3일 채택된 향회제도는 지방주민으로 하여금 지방의 공공사무에 참여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있어서 근대적 의미의 지방자치의 첫 시작을 이룬 제도라고 평가된다.
일제강점 초기에 일제는 억압정치를 통해 중앙집권적 국가의 기틀을 발전시킨다. 그 결과 조선에 존재했던 지방 자치적 제도는 대부분 폐지되게 된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통치에 한계를 느낀 일제는 30년대 부와 읍의 협의회에 의결권을 부여하는 것, 관선면협의회 회원을 모두 민선으로 바꾸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새로운 지방자치제도 개선안을 공포한다. 그러나 지방의 각종 협의회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의례적으로 통과시키는 수단에 불과했다. 즉, 일제강점기의 지방자치는 실질적 제도가 아닌 총독부의 수단으로써 역할만 수행하게 된다.
45년 해방을 통해, 대한민국은 지방분권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맞이한다. 그 주역은 건국준비위원회 지방지부 혹은 인민위원회였다. 인민위원회는 자생적으로 등장하여 자발적으로 운영된다. 해방직후 불과 몇 주만에 전국 13개 도에 도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45개 지역에 시·군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인민위원회는 해당지역에서 치안의 유지, 식량통제, 소작료 조정, 센서스 조사, 학교운영등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자치제가 효율적으로 시행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주민들의 지지와 호응이 높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지역사정에 능통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또한 제도적 측면에서 부분적으로는 인민위원회의 지도자들이 보통·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되었고 이와 아울러 지역 내 공동체의식이 발현되었다는 의미에서 민주적인 요소도 많았다. 그러나 해방직후 나타났던 이러한 자생적 지방자치는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것은 남한에 진주한 미군이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재구축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남한 주민들의 자치 능력을 보여준 인민위원회를 완전히 무시하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재를 구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지방자치제는 그 빛을 보지 못한 체 또 한 번 퇴보하는 결과를 맞게 된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12월 지방자치법을 개정, 국내의 불안정을 이유로 지방자치의 실시를 보류한다. 이로 인해 지방자치제는 실질적으로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1952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돌연 지방의회선거가 실시된다. 이는 이승만의 정치적 야심에 의한 것으로써 당시 대통령을 간접 선출하는 권한을 가진 국회가 야당 혹은 이승만의 정치적 반대파의 주도하에 있던 상황이어서 이승만의 재집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이러한 정치적 난국을 타계하기 위해 이승만은 기존 국회의 무력화를 시도하는데 그 결과로 시행된 것이 그동안 국내정세의 불안과 치안유지를 구실로 실시가 유보되던 지방의회 선거였다.(이 때 같은 이유로 통과 된 법이 국가보안법이다) 이렇게 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의회 선거는 민주주의의 발전과는 무관한 최고지도자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수단적 제도라는 한계적 성격을 지닌다.
1960년 4월 ~ 1961년5월 사이에는 4월 혁명으로 민주주의시대가 열린다. 새로 출범한 민주당 정권은 1960년 11월 1일 전면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지방자치법개정안을 확정한다. 이에 따라 그해 12월에 서울특별시와 도의회선거, 시·읍·면장 선거 및 서울시장과 도지사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지방자치 역사상 최초로 완전한 자치의 형식을 취한 것으로서 민주적 지방자치제의 출발점이라고 평가된다.
이후의 박정희 정권은 안보와 경제발전을 국가의 최우선목표로 설정한다. 그 결과 미국에 대한 의존도는 심화되어갔고,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에서 민주주의나 지방자치가 실시되는 것보다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와 권위주의적 지도력을 선호했다. 또한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전형적인 국가주도형으로서 강력한 중앙지배적 지도력을 위해 정치적 분권화보다는 정치행정 일원론적 관점에서 지방은 중앙권력기관의 대리인이자 하수인에 불과했다. 박정희 정권시대의 지방자치는 경제적 성장 이면에 자리한 독재정권에 의해 민주주의적 원리가 철저히 부정되고 지방자치가 철저히 박탈당하는 우리나라 지방자치제가 암흑기에 갇혀있던 시대이다.
좀처럼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던 대한민국의 지방자치제는 1991년 노태우 정부에 의해 다시 부활하게 된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중지되었던 이후 30년만의 일이다. 당시 지방자치제가 부활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1988년 노태우 정부의 집권과 여소야대 국회의 등장, 정국의 소용돌이와 3당 통합, 수서사건의 발발과 고건 서울 시장의 사퇴, 평민당의 장외투쟁과 국회공전 등 정치적 대공황의 시기였다. 지방자치제도는 이러한 당시의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당시 3당 통합으로 민정당 대표를 맡았던 김영삼 대표가 정치난국의 돌파용으로 갑작스레 추진한 결과물로 지방자치법 개정 후 1달 만에 지방자치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지방자치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긍정적 측면 이면에 이승만 정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전략에 의해 실시되었다는 그 한계를 지닌다. 이후 1992년 12월에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 정부는 공약사항이었던 95년 단체장선거실시를 이행하기 위해 94년 3월 4일에, 단체장선거를 포함한 이른바 4대 지방선거를 1995년 6월27일에 실시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지방자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16일에 공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6월 27일에 역사적인 4대지방선거가 실시되게 된다. 이로써 지방의회는 제2기의 출범을 기록했고, 지방자치 단체장선거는 1960년대 이후 30년 만에 부활하게 된다. 이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없던 반쪽짜리 지방자치제에서 발전해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지역주민이 선출하는 완전한 지방자치제의 시작으로 평가 할 수 있다.

중앙정치에 휘둘리는 지방자치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의 역사는 중앙정치권에 따라 그 부침을 거듭한다. 중앙집권의 정치적 이익에 도움이 될 때에만 지방선거가 이루어진 것이다. 남한 정부 수립 이후 단 한번 4·19혁명 이후인 제2공화국 때에만 대대적인 지자체 선거가 있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5.16 쿠테타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지방 자치는 중앙 정부가 지배효율성 혹은 행정효율성을 얼마나 강조하느냐에 따라 선거 실시 여부가 결정되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중앙 정부가 얼마나 민주적으로 구성되었느냐는 ‘지방자치의 실시 여부’로 판단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방 자치가 민주주의의 꽃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지방 자치제도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결과로 본다면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방자치도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현재 시행 되고 있는 지방 자치 제도의 현주소를 확인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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