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선 대전지방경찰청장

고향생각, 옛 생각하며 불효를 반성하다.

파란 하늘 아래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의 벼이삭!
집집마다 앞마당 밀짚 멍석 위에 가지런히 널어놓은 빠알간 고추!
커다란 키가 수줍은 듯 콩밭 뚝길에서 고개 숙이고 서있는 수숫대!
정겹고 풍요롭게만 느껴지던 어릴 적 내 고향의 모습들이다.
고향을 떠나 대전으로 유학을 온 것이 1980년도이니 벌써 33년이나 지났다.
부모님께서는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음에도 음식을 만들거나 밥을 짓는 일에 문외한이었던 막내 아들을 위해 대전 유학에 이어 하숙생활이라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하셨다.
철이 없었던 나는 부모님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못한 채 도시에서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만 들떠 있었다. 도시에서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
당시 1분기의 고교수업료는 5만 5천원 내외, 한 달 하숙비도 5~6만원 정도였지만, 쌀 한가마니도 5만5천원 내외였으니, 1년 공부에 쌀 20가마니가 들어가는 셈이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10마지기(2,000여평)에 불과한 우리 집 논에서 1년 동안 생산되는 쌀의 절반가량을 막내 아들의 공부를 위해 쏟아 부으신거다.
당시 마을 정미소에서 일하시던 분들의 1년 급여가 쌀 24 가마니 정도였으니, 어찌 보면 근로자의 1년 급여를 몽땅 공부시키는 데 사용하신 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어렵다는 말씀 한마디 안하시고 혹시 내가 기가 죽을까봐 기일을 넘기지 않으시려고 꼬박꼬박 학비와 하숙비를 마련해서 보내주셨다.
아버지는 우편전신환으로 보내시면서 서투른 맞춤법에 의지해 염소를 팔았다는 소소한 집안 소식들과 함께‘공부 열심히 하고 하숙집 주인 어렵지 않게 식사시간도 잘 지키라’고 당부하셨다.
아버지의 편지를 하루에도 몇 번 씩 읽으면서 해이해지는 마음을 바로 잡았었다. 그 귀중한 아버지의 정성과 가르침이 담긴 편지들은 아직까지 내 앨범 속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내가 만일 당시의 아버지였었다면, 그같은 집안 형편으로 아들의 도회지 유학이라는 어려운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하숙까지... 자신이 없다.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밖에 없다.
2학년을 마치던 겨울! 경제적 어려움에 부딪친 부모님께서는 목숨과도 같이 귀히 여기시던 빈상골의 논 두어 마지기를 남의 손에 넘기셨다. 글을 쓰면서도 맘속으로 힘드셨을 부모님 생각에 눈물이 핑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서울대 진학을 바라시는 선생님들과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학비와 생활비가 전액 지원되는 경찰대학으로 진로를 변경하여 지금은 대전지방경찰청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제 내일 모레면 추석이다.
경찰관서장들은 명절 연휴기간에도 관할을 벗어날 수가 없다.
평소에도 부모님께 효도를 못하고 살아 왔는데, 그나마 이번 추석 명절에는 고향의 어머니를 뵈러 갈 수도 없게 생겼다. 不孝父母 死後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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