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E] 내란음모죄?! 대한민국 내란죄와 그 역사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접수되면서 이 의원에게 적용된 내란음모죄를 놓고 관심이 뜨겁다. 형법상 내란음모죄 조항을 적용해 수사가 시작 된 것은 80년 김대중의 내란사건으로부터 근30년만의 일이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는 내란음모죄가 아닌 내란죄였다.)
 내란죄는 형법 87조에 국토를 참절(僭竊)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죄로 규정되어있다. 이 죄가 법적으로 보호하려고 하는 이익은 국가의 존립으로, ‘외환의 죄’가 국가의 외부로부터 이를 위태롭게 함에 반하여 내란죄는 국가의 내부에서 위태롭게 하는 죄이다. 조항 중 참절이라 함은 일본식 표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목을 베고 팔다리를 자른다는 뜻이다. 즉 국토의 참절은 영토권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배제하는 것을 말하며, ‘폭동’이란 다수인이 결합해서 폭행·협박하여 그 지방의 평온을 해할 정도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 내란죄는 집단범죄로서 그 특징으로 보면 관여된 자는 자기의 역할에 따라 △수괴 △모의에 참여하거나 지휘 및 기타 중요한 임무에 종사한 자 △부화수행(附和隨行, 아무런 주관이 없이 남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좇아 함께 어울림)하거나
 단순히 폭동에만 관여한 자로 나누어 주도적인 자에게는 중형, 군중심리에 끌렸음에 불과한 자에게는 가벼운 형이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살상·파괴·약탈 행위를 실행한 자는 지휘 및 기타 중요한 임무에 종사한 자와 동일하게 취급한다. 또한 미수범·예비·음모·선동·선전도 처벌을 하게 되어있으며, 실행에 이르기 전에 자수한 때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한도록 규정되어 있다(형법 89·90 ① ②). 이번 이석기 의원은 내란예비음모죄가 적용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처벌조항은 무엇인가? 내란죄의 수장은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받게 되고 내란을 모의한 지휘부도 사형부터 징역 5년 이상의 형이 선고된다. 아울러 이 같은 내란을 예비하거나 음모한 경우에도 최소 징역 3년 이상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건국이후 검찰이 내란죄를 직접 적용해 기소한 것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란음모죄로 DJ를 기소한 세력들이 나중에 내란죄로 유죄를 받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내란죄의 직접 적용과는 다르게,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 시절엔 '인혁당 사건',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 사건' 등 내란 관련 혐의가 다수 적용된 바 있다.
 
 내란음모 혐의가 사상 최초로 등장한 것은 지난 1966년 김두한 당시 의원이 주축이 된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이다. 지난 1966년 1월 김 의원은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위반, 폭발물 사용음모 등의 혐의로 체포된다. 당시 김 의원은 1965년 7월 서울 을지로에 위치한 자신의 사무실에서 박후양 한독당 선거위원회 부위원장 등과 만나 이른바 '5단계 혁명 음모 계획'을 들은 뒤 학생과 노동자들을 동원해 정부를 전복할 것을 모의한 혐의를 받았다. 허나 이것은 같은 공화당의 의원들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하며, 같은 달 29일 국회에서 김 의원에 대한 석방동의안이 통과된다. 당초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를 적용했던 검찰은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로 공소사실을 변경하고 엄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같은 해 5월 10일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내란음모죄는 5년 뒤 다시 등장한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 예비·음모' 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이들은 심재권 의원, 이신범 전 의원, 고 조영래 변호사와 고 김근태 의원 등이다. 이들은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 폭력을 이용한 주요 관공서 파괴·점령과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도모하는 등 헌법기능을 정지시킨 뒤 정부전복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은 장기표, 심재권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이신범에게는 징역 2년을, 조영래에게는 징역1년6월을 각각 선고했다. 그러나 반국가단체 구성과 예비·음모 부분에는 무죄가 선고됐다.

19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에도 '내란음모' 혐의가 적용됐다.
검찰은 대구·경북지역 혁신계 인사들이 1964년 적발돼 와해됐던 인혁당을 재건해 민청학련의 유신반대 투쟁을 조종하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 정부 전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253명을 구속하고 23명을 기소했다. 주범으로 꼽혔던 도예종 등 8명에 대해서는 사형이 선고됐고, 판결 18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판결문이 그들의 집에 도착도 하기 전에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국제 엠네스티는 사형집행은 사법살인이며, 사형판결이 있는 날을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날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 역시 재심을 통해 무죄로 결론 났다. 법원은 2007년 1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수사기관의 조작, 고문이 있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또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서도 2009년 9월 "내란죄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무죄로 판결했다. 허나 관련자 8명은 이미 사형된 후였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내란음모죄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80년이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세력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배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목하면서다. 군사재판에 넘겨진 김 전 대통령은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정부 결정에 따라 무기징역으로,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김 전 대통령은 이 선고로 2년 7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1995년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재심을 청구했다. 2004년 2월 법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1979년 12·12사태와 1980년 5·18을 전후해 발생한 신군부의 헌정파괴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행한 정당한 행위이므로 형법 제 20조의 정당행위에 해당,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가장 최근에 내란죄가 적용된 이들은 앞서 말했던 대로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이들은 5·18 특별법이 공표된 이후인 1996년 내란죄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이들은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당선자의 요청으로 특별 사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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