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한편] 맏물
[수필한편] 맏물
  • 당진신문
  • 승인 2021.09.17 19:13
  • 호수 137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득주 수필가, 대전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지난해 봄이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밭둑에 풀이 파릇파릇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는 어느새 비닐을 꺼내 텃밭에 깔기 시작한다. 몇 년 전부터“이제는 농사일 더는 못 하겠다”하셨지만, 봄만 되면 고추 묘를 또 사다 심었다.  

고추 모를 심은 후 한 열흘 동안은 잎들이 시들 배들 해진다. 온종일 따뜻한 비닐하우스에 머물다 하루아침에 허허벌판으로 나왔으니 엄청난 시련일 것이다. 그 기간이 지나야 고추 뿌리는 땅 내를 맡고 착지를 한다. 대가 탄탄해지고 잎들은 작은 바람에도 너울거리며 선연해진다.

이때쯤 줄기에서 Y자 모양의 가지가 나온다. 어머니는 여기를‘방아다리’라고 했다. 방아다리 아래에서 나오는 곁순은 모조리 따 주어야 한다. 

지주목을 세우고 포기 사이에 요소비료를 한 숟가락씩 넣어 주면 고추 모는 무럭무럭 잘 자란다. 모든 식물은 햇볕을 먹으며 성장한다. 온기를 먹고 달려온 바람은 가끔 반가운 소나기도 안고 달려올 것이다. 

방아다리에 첫 열매가 달리기 시작한다. 포기마다 한 개씩 자랑스럽게 달고 나와 그동안 잘 키워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만 같다. 어머니는 연둣빛 고추가 땅을 내려다보고 다소곳이 달린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방아다리에 달린 고추를 모조리 따라고 하셨다.“어머니! 익지도 않은 첫 열매를 왜! 다 따요”나의 물음에 그걸 놔두면 영양분이 거기로 몰려서 고추가 덜 달린다고 했다.  

고추 줄기에 처음 열리는 고추를‘맏물’이라고 했다. 맏물은 크기도 작고 모양도 그리 예쁘지 않다. 주름이 잡히고 기형인 것도 있다. 많은 열매가 달리다 보면 이렇게 작고 얼굴도 못생긴 열매가 하나씩 생기는 법이다. 누군가는 감당해야 할 몫이다. 맏물은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본의 아니게 차별 대우를 받게 된다. 하지만 맏물이 없으면 둘째도, 셋째도 나올 수 없는 게 아닌가.  

어렸을 적 일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여동생이‘일본뇌염’에 걸렸다. 병원이 별로 없었던 시절, 부모님은 침쟁이 노인을 찾아다니며 침을 맞혔다. 온 동네에 비상이 걸렸고 사망한 아이가 생길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사경을 헤매던 여동생은 부모님의 정성으로 두 달 만에 간신히 살아났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에서 힘없이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기 시작하더니, 지금껏 육십이 다 되어 가도록 집에 오지 못하고 정신 보호시설에 머물고 있다. 맏물 고추가 못 생기고 기형이듯 집안에 여러 형제가 태어나다 보면 허약하고 부족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여동생도 그중에 한 사람일 뿐이다.   

정신시설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온 여동생은 최근 상태가 조금 나아져, 한 달에 한 번 특별휴가를 나와 혼자 계신 어머니를 돌본다. 다른 형제들은 맞벌이와 자식 뒷바리 지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 나부터도 직장을 핑계로 자주 시골에 가질 못했다. 하지만 여동생은 가진 것 하나 없이 시설에서 평생을 살고 있지만, 기쁜 마음으로 일주일씩 머물며 식사도 챙겨 드리고 교회도 같이 다녀오고 정성을 다한다. “못생긴 자식이 효도한다”는 말이 있다. 몸도 마음도 온전(穩全)치 못해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 하는 여동생이 구순의 어머니를 끔찍이 챙기고 있다.      

피붙이 자식 하나 없는 여동생이 내년이면 육십이 된다.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재롱부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건만 가엾이 나이를 먹어 간다. 맏물 같기만 한 여동생을 면회하고 올 때면 운전대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삶이 무언지. 부모님을 도와서 어떻게든 병을 고쳐 주었어야 했는데, 나 살기 어렵다고 손을 써 주지 못했다. 그런데도 형제들을 위해 맏물이 되어 준 동생을 보면 늘 죄인 같아 미안하다.   

여동생은 평생 시설에 머물며 밀려오는 그리움을 어찌 잊고 살았을까. 그리운 고향, 그리운 친구가 생각나면 멍하니 고향 하늘만 쳐다보았겠지. 저를 이곳에 보낸 부모와 오빠를 얼마나 원망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리다. 그러나 여동생은 한 번도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치레하는 어머니 걱정만 하고 있다.  

맏물 고추는 빨간 가을을 만나지도 못한다. 욕심 없이 자기 일에만 최선을 다한다. 매운맛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른다. 첫 열매로 나와 자리만 펴 놓고 간다. 하지만 누군가는 맏물이 되어야 크고, 두껍고, 매운 고추가 나올 수 있지 않은가. 평온한 세상은 맏물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돌고 돌아간다. 이제껏 내 안에 삶만 붙잡고 연연하며 산 세월이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