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내포민속문화연구소장, 합도초 교감

[당진신문=이인화 내포민속문화연구소장] 당진은 해안도시다. 하지만 그 아름답던 해안은 간척사업으로 모두 공장, 논경지로 바뀌어 그 좋은 자연경관이 다 사라진 안타까운 곳이다. 그렇다고 높은 산도 없고 물 좋고 쉴만한 공간도 없다.

그러다 보니 여름철이 되면 쉬고 놀 만한 계곡을 찾아 나서야 하는 한다. 하지만 그런 좋은 장소가 될 곳이 있다. 역사문화적으로도 가치가 있고, 경관도 아름답고 빼어난 곳. 지역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사람들과 함께 할 만한 곳 바로 승전목이다. 


- 글 싣는 순서 -

① 동학농민전쟁의 유일한 승전지 ② 소중한 역사문화 공간 승전목 
③ 승전목을 역사문화교육장으로 ④ 승전목에 대한 그동안의 노력과 과제


승전목의 폭포 모습. 사진제공=이인화 내포민속문화연구소장, 합도초 교감
승전목의 폭포 모습. 사진제공=이인화 내포민속문화연구소장, 합도초 교감

승전목 전투는 1894년 9월 28일 상부의 명령을 받아 10월 1일 내포지역 동학군들이 일제히 기포하면서 시작되었다. 10월 18일경 여미벌에 초막을 치고 유진(留鎭)하면서 태안·서산 등의 동학군들이 모여들어 24일경에는 수만 명이 집결하였다. 

이때 면천에 한명순이나 이화삼, 한명순(韓明淳), 당진의 박용태(朴瑢台), 김현구(金顯玖) 등 접주들이었다.
일본군 아까마쯔(赤松國封) 소위는 10월 23일(양력 11월 20일) 여미벌 부근 고지와 해미성에서 동학군의 공격을 받아 사력을 다해 방어 중이라는 연락을 받고 1개 소대와 2개 분대를 이끌고 출동했고, 동학군은 승전목(勝戰谷)으로 이동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승전목은 면천면 사기소리와 당진읍 구룡리 사이 좁고 가파른 계곡이다. 북쪽에는 옛날부터 당진군수가 기우제를 지내던 용주봉인 이배산(離背山)이 자리잡고 있고 남쪽은 면천면 삼웅리의 웅산(雄山)에서부터 이어지는 가파른 능선으로 어떤 병력도 통과하기 어려운 요충지다. 

동학군 약 2만명이 승전곡에서 승리를 거둔 상세한 기록을 일본인들이 직접 남긴『공사관기록』을 통해 생생히 알 수 있다. 

필자가 1997년 〈내포지역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과 그 결과〉를 통해 처음 기록을 소개하고 《당진시지》(1997), 《당진읍지》, 《당진 동학 의병운동사》 등의 책을 통해 여러 번 소개한 바 있다.

일본 『공사관기록』에 승전곡(勝戰谷) 부근 전투상보(戰鬪詳報)를 보면

(1) 1개 소대와 2개 분대, 한국병사 34명이 참전했다.(필자주 약 89명)

(2)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아침에 모든 병사의 배낭을 말에 싣게 하고 여미평을 향해 전진했다.

(3) 오전 10시경에 총소리를 듣고 제3분대를 승전곡 서쪽 고지로 보내 수색케하고 지대는 전진했다.

(4) 전방 1,500m 벌판에 10여 명의 동학군을 발견하고 계속 전진하여 승전곡 좁은 골짜기 서쪽 고지에 이르렀다. 500m 전방 밭에 4∼5백 명의 동학도가 깃발을 날리며 있었다. 일제 사격을 가하니 사방으로 흩어졌다. 11시 30분경 그곳으로 전진, 점심을 먹게 했다.

(5) 0시 30분 한국 병사 34명을 서쪽 산길로 전진시키고 제2분대, 제3분대, 제4분대 27명을 오른쪽 산길에 배치하고 나머지를 본대로 삼아 본도(本道)로 전진시켰다. 이 때 전방 양고지 일대에 1만 5천여 명이 깃발을 날리며 방어하고 있었다. 1개 분대로 하여금 오른쪽을 경계케 하고 본대(2개 분대 반)는 흩어져 6백m 앞으로 전진했다.

(6) 하오 3시 30분 경에 오른쪽 산길로 전진하던 한국 병사가 퇴각해 왔다. 산상에서 수천명 적군이 사격하는 데다 서풍을 이용, 산과 들에 불을 지르니 그 연기와 불길로 퇴각했다. 오후 4시 전군을 후퇴시키자 적의 반격은 맹렬했다. 본대는 오른쪽 시냇물을 따라 후퇴, 승전곡의 좁은 곳을 일퇴 일지하며 빠져나와 면천까지 퇴각했다. 어찌할 방도가 없어 퇴각을 속행, 오후 10시 덕산으로 들어갔다. 22일에는 홍주로 퇴각했다.

(7) 그리고 퇴각할 때 유실한 물품은 78명분의 배낭, 상하 겨울내의, 밥통, 구두, 그리고 쌀자루와 휴대 식량 312식분이었다. 적도 전사자 3명, 부상자는 미상이며 소비 탄약은 612발이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갑오김씨가갑오년피란록』에는 이날 친척들과 뒷산에 올라가 바라본 전투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병정들이 출전 모습을 보고자 친척들과 뒤 봉우리에 올라갔다. 바라보니 금일 미명에 이미 여미로 출발했다. 종일 포향이 끊이지 않으며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어 살기가 가득하고 햇빛도 어두웠다. 
나는 승전소식이 들려 오기를 바랬다. 오후에 쌀을 지고 읍(면천)에 갔던 사람이 돌아왔다. 이르기를 '여미로 출병했던 병정들이 승전에 당도, 겨우 일진을 파하고검악 후봉에 이르니 수 만명 대진이 나타나자 기가 질려 총 한 방 못 쏘고 즉각 퇴병했다'한다. ....얼마간 지나자 승전곡 기슭에서 포성과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고 화염이 골짜기를메웠다. 얼마인지 모르나 만 여 명 비류가 산과 들을 짓밟으며 면천읍으로 달려 들어갔다.」

승전목 전경. 사진제공=당진시동학농민혁명승전목기념사업회
승전목 전경. 사진제공=당진시동학농민혁명승전목기념사업회

『조석헌역사』에는 동학군이 승전곡을 지날 무렵 일병 4백 명과 병정 5백 명 그리고 유회군 수 천 명이 중로에 복병했다가 돌출하여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한병 십여 명이 중상하자 대패 도주했다 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일본측 기록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상의 기록을 정리하여 보면 먼저 면천읍에서 아침에 출발한 일본군은 삼웅리 나무고개를 넘어 면천면 송학리와 삼웅리 경계 산을 수색케 하고 면천면 삼웅리와 사기소리 리계인 안양주유소 뒷산을 점령했다. 

11시 30분 사기소리 중심지점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12시 30분부터 산 능선으로 오르며 동학군과 일본군의 공방전은 치열해졌다. 3시간에 걸친 싸움 끝에 55명 정도의 일본군과 한국군 34명은 일방적으로 패하여 후퇴하고 만다. 이 전투는 동학군이 일본군에게 유일하게 거둔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투이다. 

이 여세를 몰아 동학군 2만여 명은 단숨에 면천읍을 점령하고 하루를 유숙한 후 일본군이 합덕으로 후퇴하자 이를 추격하여 1894년 10월 25일(양력 11월 22일)에는 예산군 고덕면 구만포(九萬浦)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대교김씨가 갑오피란록』에도 농민군이 승전곡에서 승리하고 면천읍에 입성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박인호의 『갑오동학기병실담』에는 「승전곡 전투후 농민군은 면천에서 하루를 유진하고 덕산 구만포(九萬浦)를 지나다가 관군과 2차 접전을 하여 관군을 물리쳤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면천, 합덕, 덕산을 거치면서 2만여 명이었던 동학군이 자꾸 불어 『천도교회사 초고』에는 약 5만 여명이 됐다고 하는데 이는 승전목에서 승리의 여세를 몰아 면천, 합덕, 당진지역 동학도들이 계속 가담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홍주성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고 아픔만 남기긴 전투지만 외세의 침입에 불굴의 의지로 일어선 승전목전투 승리를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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