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송악읍 금곡리 한음 이덕형(李德馨) 선생 영당

한음 선생 영정, 사진제공=문화재청
한음 선생 영정, 사진제공=문화재청

[당진신문=이석준 수습기자] 당진 지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문화유적지가 많다. 예산이 투입돼 활발하게 복원되고 관리되는 곳들도 있으나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역사문화유적지도 있다. 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지역의 소중한 자산인 당진의 역사문화유적지를 조명해보려 한다. 지역 내 역사·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그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오성과 한음 일화로도 유명한 한음 이덕형(1561~1613)은 오성 이항복(1556~1618)과 함께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신이다. 

서울 남부 성명방(지금의 을지로 일대)에서 태어난 이덕형은 19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올라 이조참판 겸 대제학이었던 31세 임진왜란이 발발, 명군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병조판서 직을 맡아 군부를 총괄하는 등 뛰어난 능력을 펼쳤다.

조선 시대의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명분과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 사회 조선에서 양반가 자제인 오성과 한음은 재치 넘치는 일화들을 남겼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유쾌한 성격이었던 이덕형은 오성과 한음 일화를 남겼는데 그중 유명한 것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음으로부터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신 감정을 부탁받은 오성이 그 집에 이르러 시신을 감정하다가 갑자기 한 시신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혼비백산했는데 알고 보니 시신인 척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는 일화가 있다.

또 다른 일화는 서당에서 오성과 한음을 가르치던 스승이 졸자 오성과 한음이 서당에 불이 났다며 스승을 깨웠다.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스승은 “공자님을 뵙고 왔다”고 변명했다.

얼마 후 오성과 한음이 졸기 시작하자 스승이 이를 꾸짖었는데 두 소년은 “공자님을 뵙고 왔다”고 말했다. 스승이 “공자님이 뭐라고 했느냐”고 묻자 오성과 한음은 “공자님이 스승님을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라고 말해 스승을 골탕 먹인 일화가 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의 민담 중 오성과 한음 이야기가 당대에 더 많이 회자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임진왜란 이후 신분 질서의 혼란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양반들은 도망가기 급급하고, 당시 신분 질서에 의해 천대받던 승려들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이 전개되면서 기존 지배층인 양반들에 대한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청렴한 선비, 인간적 면모를 지닌 양반을 언급하는 빈도가 높아지는 등 나쁜 양반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이중 대표적인 것이 오성과 한음 일화다.

한음 선생 영정으로 향하는 표지판.
한음 선생 영정으로 향하는 표지판.
한음 선생 영당 정면, 사진제공=당진시청
한음 선생 영당 정면, 사진제공=당진시청

한음 선생의 영당(영정을 모신 사당)이 당진시 송악읍 금곡길 134에 있다. 한음 선생 영정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8호로 지정돼 있다. 한음 이덕형의 본가와 묘소는 모두 경기도 광주에 있고, 오성과 한음 일화로 유명한 곳은 경기도 포천 일대인데 한음 선생 영당이 어째서 당진에 있는 것일까?

남광현 문화재 팀장은 “조선 후기로 가면서 가문의 분화가 많이 일어났는데 한음 이덕형의 후손 중 일부가 당진으로 오며 영정을 필사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며 “가문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문중의 유명한 인물을 자신들의 선조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당시까지도 한음 이덕형의 명망이 높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넘치는 재치와 장난기로 어른들을 골탕 먹이고 재치 있게 빠져나가는 인간적인 면모와 명재상이자 청렴한 양반계급의 면모를 동시에 지닌 오성과 한음의 일화는 임진왜란 이후 신분 질서의 붕괴 가속화되고 양반 지배층에 대한 분노가 쌓여가는 상황에서 억압된 민중들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역할을 했다.

남광현 팀장은 “양반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양반에 대한 민중들의 적개심을 무마시킬 필요가 있었고,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양반 지배층에 대한 분노와 응어리를 풀어낼 대상이 필요했던 상황이었다”며 “오성과 한음의 일화가 널리 퍼지고 재생산 된 것은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한 부분도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음 선생 영당 정면, 사진제공=당진시청
한음 선생 영당 정면, 사진제공=당진시청

오성과 한음을 시의 상징으로 홍보하며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포천시처럼 당진시도 한음 선생의 영당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없을까? 결론적으로 현재 당진시는 한음 선생 영당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있다.

그 이유는 한음 선생 영정이 현재 도난당해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1998년 문중에서 보관 중 종손이 사망한 이후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것.

당시 영정의 도난 사실을 처음 인지했던 남광현 팀장은 “당시 점검 차 영정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300년 이상 된 그림의 채색이 변하지 않았음을 이상하게 여기고 후손들을 추궁한 결과 영정이 도난당한 사실을 털어놓았다”며 “문중, 개인이 관리하는 문화재들은 도난당하거나, 훼손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고 말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당진시는 문중, 개인이 관리하는 문화재를 공공기관에서 위탁해 관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며 “도난당한 한음 선생 영정도 하루빨리 회수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심정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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