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의 흔적 공존하는 곳...문중사찰 신암사
고려와 조선의 흔적 공존하는 곳...문중사찰 신암사
  • 이석준 수습기자
  • 승인 2021.05.08 12:00
  • 호수 135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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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 시대 문중사찰 ‘신암사’

[당진신문=이석준 수습기자] 당진 지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문화유적지가 많다. 예산이 투입돼 활발하게 복원되고 관리되는 곳들도 있으나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역사문화유적지도 있다. 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지역의 소중한 자산인 당진의 역사문화유적지를 조명해보려 한다. 지역 내 역사·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그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고려 양식의 신암사와 7층 석탑.
고려 양식의 신암사와 7층 석탑.

당진에는 대표적인 사찰인 영탑사, 안국사지를 비롯해 크고 작은 사찰 유적이 많다. 오는 5월 19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지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보존 할 가치가 있는 사찰을 소개하고자 한다.

송악읍 가교리에 위치한 신암산의 동남쪽 계곡 끝자락에는 700년 된 작은 사찰이 하나 있다. 능성 구씨 집안의 문중 사찰인 신암사다. 신암사는 고려 충숙왕(1313~1330)시기 문신 구예(具藝)의 부인 아주 신씨(鵝洲申氏)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위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신암사는 절 중앙에 위치한 극락전을 중심으로 왼편에는 고려 시대 불교유산이, 오른편에는 조선 시대 유교유산이 자리 잡고 있다.

신암사의 형태에 대해 당진시 남광현 문화재 팀장은 “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능성 구씨 집안의 문중사찰로 운영된 신암사는 고려 시대 불교유산인 극락전과 금동여래좌상, 산신각, 7층 석탑이 먼저 생기고 이후 조선 시대 유교유산인 구예 묘지석, 제실이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고려 양식의 금동여래좌상. 사진제공=문화재청.
고려 양식의 금동여래좌상. 사진제공=문화재청.
고려 양식의 산신각.
고려 양식의 산신각.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지정해 전국에 많은 사찰을 세우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국가행사로 지정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적극적인 숭불정책을 시행했다. 조선은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통해 불교를 탄압, 고려 왕실과 문벌귀족의 후원을 받던 사찰들을 몰락시켰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더군다나 신암사를 운영하는 능성 구씨는 조선 시대 다수의 고위 관료를 배출한 명망 높은 양반 가문이다. 숭유억불을 내세우며 성리학을 중시했던 조선 시대 양반 가문에서 어떻게 문중사찰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한국미술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김정희 교수는 “중앙정계에 진출했다고 해도 가문의 문중에서 문중사찰을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며 “조선 초 불교가 탄압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앙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 민간에는 이미 불교와 결합한 민간신앙이 널리 퍼져 이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또한 “원찰을 세우고 시주하는 등 불교를 옹호했던 효령대군의 사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창건한 정조의 사례 등 왕족들이 불교에 심취한 경우도 많았다”며 더불어 “당시 조선이 왕실의 안녕을 빈다는 명분으로 민간에 불교 원찰은 허용한 경우도 많았다”고 전했다.

당시 조선이 표면상 숭유억불 정책을 폈고 불교에 대한 탄압도 이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민간신앙과 결합해 민간에 널리 퍼져 있고 왕족, 유학자들이 불교와 교류하는 경우도 빈번했다는 것. 문중사찰인 신암사도 당시 민중들의 원찰의 역할을 하며 명맥을 유지해온 것으로 추측 할 수 있다.

구예 묘지석, 능성 구씨 묘역.
구예 묘지석, 능성 구씨 묘역.

실제 능성 구씨이자 조선 전기의 학자인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의 시구절을 통해 성리학자임에도 불교와 교류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시문에 밝았던 구봉령은 승려들과 교류하며 수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일부를 소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계당의 선필은 연기와 노을을 뿌려 논 듯(溪堂仙筆灑煙霞)
명산에 떨어져 머물렀던 곳이 얼마였던가(散落名山定幾多)
어찌 홀로 후에 와서 찾을 곳이 없을까(渠獨後來無覓處)
다만 눈물을 머금고 구름 언덕을 지날 뿐이라(故應含淚過雲阿)
/영정 산인에게 주다(贈永貞山人) 발췌


해운의 깊은 곳, 백암산에(海雲深處白山)
장실 스님은 그 해에 함께 웃고 얘기했지 (丈室當年共解顔)
돌이켜 생각해 보니 20년이 꿈만 같아(回憶卄齡還似夢)
흰머리 상대하니 서로 봄이 의아하네(白頭相對訝相看)
/백암사 승려 경진에게 써준 시 일부 발췌


남광현 문화재 팀장에 따르면 “원찰의 운영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고는 하지만 고위 관료의 경우 불교와의 교류는 정치적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며 “능성 구씨 가문이 조선 시대 문중에서 사찰을 운영했음에도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되지 않은 이유는 당쟁과 정쟁에 참여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성과 원찰(죽은 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 운영을 통해 지역에서 인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신암사는 비록 소박한 규모의 사찰이지만 700년 동안 유지되고 있다. 더불어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흔적이 공존하고 있는 문중사찰은 신암사가 유일하다. 그런데도 현재까지 신암사는 문화재로 지정, 관리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문화재를 보존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 할 수 있도록 당진시의 관심이 필요하다.

시 관계자는 “신암사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문중사찰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문화재이며 비록 규모는 작지만, 역사 문화적 가치가 상당한 만큼 그 전승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