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당진시 향토유적 제1호, 군자정

[당진신문=오동연 기자] 당진 지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역사문화유적지가 많다. 예산이 투입돼 활발하게 복원되고 관리되는 곳들도 있으나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역사문화유적지도 있다. 본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지역의 소중한 자산인 당진의 역사문화유적지를 조명해보려 한다. 지역 내 역사·문화·유적지를 둘러보고, 그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연못 군자지(君子池)와 군자정의 모습. 연못을 건너 정자로 향하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연못 군자지(君子池)와 군자정의 모습. 연못을 건너 정자로 향하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면천면 일대에는 대표적 문화유적인 면천읍성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문화유적이 많다. 요즘같이 봄꽃이 피는 시기에 골정지에는 많은 시민들이 방문하지만, 지나치기 쉬운 장소가 군자정이다. 

면천 군자정은 당진시 향토유적 제1호이기도 하다. 군자정은 구 면천초등학교 자리 동쪽에 있는 연못(면천면 성상리 778번지) 군자지(君子池) 가운데 위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정을 얘기하려면 연못인 군자지(君子池)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군자정은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군자지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간다. 연당(蓮塘), 낭관호 등으로도 불렸던 군자지에 대한 기록은 1530년 중종 대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데, 고려시대 때 지군사(군수)인 곽충룡이 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못의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못 가운데에 있는 정자, 군자정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당진시미래유산 구축사업 자료집에 따르면, 군자정의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1800년대 후반에 쓰인 ‘면천읍지’에는 1803년 혹은 1863년에 새로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정자를 짓게 된 배경과 정자와 연못에 대한 의미를 기록한 누정기(樓亭記)의  ‘군자정기’에 따르면 면천 군수 유한재가 피폐해진 연못를 보수하면서 못 가운데 둥글게 섬을 만들고 그 위에 팔각의 정자를 짓고 못에 연꽃을 심고 물고기를 넣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유한재 면천군수가 부임한 것이 1802년이기 때문에 군자정이 세워진 시기를 1803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군자정이 위치한 연못이 계속 유지돼 온 것은 아니었다.

1656년 실학자 유형원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 전국지리지인 ‘동국여지지’에 군자지가 언급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곽충룡이 또 공관 앞에 못을 파고 이름을 군자지(君子池)라 하였고, 성 동쪽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강구정이라 하였으며, 성 서쪽에는 당(堂)을 지어 이름을 치의당이라 하였다. 이제현이 모두 *찬을 지었다. 지금은 모두 메워지고 없어졌다” (*찬-인물이나 사물을 기리어 칭찬하는 글 .글제로 써넣는 시(詩), 가(歌), 문(文) 따위의 글. 이제현-1287년 출생해 1367년까지 활동한 인물로 당시 고려사회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 문하시중이라는 고려 최고 관직까지 올랐고,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고 있었다.)


당진시청 문화관광과 남광현 문화재팀장은 “동국여지지 기록으로 볼 때 1656년에는 군자지가 이미 폐허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못 군자지(君子池)와 군자정의 모습. 연못을 건너 정자로 향하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연못 군자지(君子池)와 군자정의 모습. 연못을 건너 정자로 향하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연못이 네모진 것은 땅을 상징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을 상징한 것이며, 정자가 팔각인 것은 팔괘(八卦)를 상징한 것이고 꽃과 나무는 만물을 상징한 것으로 전해진다. 팔각정도 계속 유지해온 것은 아니었으며 언제 허물어졌는지도 모르게 주춧돌만 남아있던 시기가 있었다. 

현재 알려진 복원시기는 우선, 1959년에 면천 복씨 종친회장(복진구)이 주춧돌보다 규모가 작은 육각정으로 다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3년에 이 정자는 당진군 지정 문화유적 제1호로 지정됐으며, 1994년 당진군은 ‘건강한 국토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국비와 도비를 지원받아 팔각정으로 다시 지었다.  

남광현 문화재팀장은 “군자정은 말하자면 사또의 후원으로, 정치를 논하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장소들은 많이 없어진 상태라 더욱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돌다리와 ‘낭관호’비석

 또 하나의 주목할만 것은 군자정으로 향하는 돌다리와 ‘낭관호’라 씌여있는 작은 비석이다. 연못을 건너서 정자로 가는 돌다리의 길이는 7.4미터 폭이 65cm로, 4개의 자연석으로 이뤄져 있다. 군자정 안내 표지석에 따르면 1803년 축조된 후 원래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한다. (돌다리도 연못처럼 고려시대 축조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돌다리를 건너 군자정 주위에 세워져 있는 작은 비석에는 한자로 낭관호라고 새겨져 있다. 

돌다리의 길이는 7.4미터 폭이 65cm로, 4개의 자연석으로 이뤄져 있다. 군자정 안내 표지석에 따르면 1803년 축조된 후 원래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한다.
돌다리의 길이는 7.4미터 폭이 65cm로, 4개의 자연석으로 이뤄져 있다. 군자정 안내 표지석에 따르면 1803년 축조된 후 원래 모습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한다.

1894년~1895년 부임했던 박시순 군수의 면불일기에 낭관호 비석이 언급돼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의 객사에서 동쪽으로 십여걸음 거리에 군자지가 있는데 고려 공민왕때 지군사 곽충용이 지은 것이다. 그 안에는 연꽃을 심었다. 이제현이 그곳에 찬하여 꽃과 열매가 동시에 열리고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은 것이 군자와 같으므로(중략) 연못의 이름을 군자지라 한 이유다. 오백년이 지나고 읍지에만 실려있을 뿐 사라져서 전해지지 않았는데 영묘 계해년(1802년)에 이르러서 군수 유한재가 고적을 탐방하여 그 연못을 파고 각을 잡았다. 그안에 우물을 파고 둥근섬을 만들고 섬 위에는 팔각의 작은 정자를 지었다. 이후에 또 계속 관리하는 사람이 없자 정자가 훼손되고 연못은 망가졌는데 성상 경진년(1880)에 이르러 군수 임백헌이 다시 수리하여 옛터에 정자를 지은지 16년이 되었다. 내가 이 고을에 부임한 다음 중춘에 우연히 관노비와 걸어서 정자위에 올라갔는데 처마와 기둥은 기울었고 연못과 섬은 황폐해져 수초만 뒤섞여 자라서 우거지고 연꽃의 향기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이에 전리에게 명하여 정자를 띠로 덮게 하고 마침내 성 내외의 촌정을 보내어 연못을 파니 삼일만에 일이 끝났다. 연못의 둑에 엎어져 있는 돌이 하나 있어 이끼를 쓸고 문질러 닦으니 ‘낭관호’ 세글자가 있는데 세워서 고정 시켰다. 섬주위에 대나무가 무리를 지어있어 지져분한 것을 제거하고 복돋워 심었다. 또한 버드나무와 백목련을 둑의 사방에 섞어 심었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볼 때 낭관호 비석은 군자정이 조성된 시기보다 훨씬 앞섰을 것으로 예상되며 연못이 조성된 시기(고려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낭관호라고 씌여있는 비석. 1894년~1895년 면천에 부임했던 박시순 군수의 면불일기에 낭관호 비석이 언급돼 있는데, 이미 그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낭관호라고 씌여있는 비석. 1894년~1895년 면천에 부임했던 박시순 군수의 면불일기에 낭관호 비석이 언급돼 있는데, 이미 그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낭관호는 이태백이 뱃놀이를 즐겼던 호수 이름으로 당시 군자지의 풍경을 낭관호에 비교한 것으로 보아, 그만큼 아름다웠던 것으로 보인다. 연당(蓮塘)으로 불리어졌던 점, 그리고 군자정기 기록상 100개의 연꽃을 심었다는 것을 보아 연못에는 연꽃이 가득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연꽃은 사라졌지만, 봄날인 요즘 군자정 주위에 벚꽃이 흩날리고, 제법 큼직한 잉어가 한가로히 연못을 노닌다. 아주 오래 전 수많은 연꽃이 피어있었을 옛 모습을 상상해본다.

군자정을 나오는 길에 흩날리는 벚꽃잎을 맞으며 시민들이 차 한잔씩 가지고 돌다리를 건너 군자정에 자리잡는다. 따뜻한 봄날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을 맞으며 군자정에 앉아 차를 마시는 사람들의 눈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먼 옛날 봄날에 군자정에 앉아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모습도 머릿속에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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