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팔 당진시사회복지협의회 회장/당진돌봄사회서비스센터 대표이사

[당진신문=송영팔]

가끔은 우울할 때가 있다. 황혼이 어스르함이 깔리는 저녁이면 더욱 그렇다. 불꽃 같은 젊은 정열, 한 순간에 지나간 듯 세월이 무상하다. 요즈음은 거울 앞에 서기가 부끄럽다. 그 절망감을 잠시 느낀다. 문득 창문 열어 보이는 것은 청정 하늘인데 왜 눈물이 나는지. 내게도 흔한 노인성 우울증후군이 아닌지 싶다. 이쯤이면 뇌에서 명령을 내린다. 

“그러지 마라! 저 넓은 운동장으로 나아가라. 너를 다시 창조하라. 앞을 향해 뛰어라.”

이것은 위기극복을 대처하는 내자신의 처방전이다. 요즈음도 쉬지 않고 동분서주한다. 초겨울 함박눈이 내리는 저녁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관장님! 저 죽으려고 아버님 산소에 왔어요” 

자살하겠다는 것이다. 너무 차분한 목소리에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죽으려면 잠시 기다려라”는 말과 함께 통화를 지속하며 그 곳으로 달려 갔다. 한 순간에 결정한 내 판단이 옳았다. 

산소 옆 나무에는 노끈이 걸려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 여성은 생명 끊음을 감행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헤어졌던 남편의 사망으로부터 온 우울증이였다. 전문가의 진단이 그랬다. 지금은 몸도 맘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현대인의 질병 중 우울증은 발병율이 매우 높다. 인간에게 올 수 있는 질병 중 네번 째라는 것이다. 그 우울증 환자의 15% 정도는 자살로 이어진다고 했다. 어느 유명 작가는 “자살이란 자신의 목숨이 자기 소유물임을 만천하에 행동으로 명확히 증명해 보이는 일, 피조물로서의 경거망동, 생명체로서의 절대 비극, 그러나 가장 강렬한 삶에의 갈망”이라며 자살에 대한 정의를 했다.  

자살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결과로서 생명 끊음을 한 것이다. 원인과 과정이 분명히 있다. 유명 연예인도, 정치인도, 명강사도, 우리들이 인정했고 존경했던 선구자도 그랬다.

최근에 자신의 생을 마감한 유명정치인이 있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 잘못을 인정했다, 바라기는 죄값이 있다면 달게 받고 살아 주었으면 했다. 그 것은 내 욕심이다. 그의 뇌 속에 쌓인 결과물은 우울증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지금 이 순간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그는 여기에 와 일박이일 동안 미래 백년, 천년의 비젼을 함께 나누었다. 

그의 정신세계는 짧은 기간에 우울감이 폭주했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해소할 수 없었던 일말(一抹)의 돌파구는 원초적 본능을 선택했나 싶다. 자아에서 초자아의 선택은 뒤로하고 결국 죄의 본능을 선택했을까! 그 것이 그의 죄라면 그 행위가 잘못됨을 인정했고 그 값을 죽음으로 가름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심각한 내면세계에서 폭발되어 지는 우울감이 있다. 그 우울증이 분노하면 선택은 죽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 생명을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는 없다. 오직 하나님이 그 역할을 할 것이다. 유명 작가의 자살 정의 중 ‘경거망동’, ‘절대비극’이라는 단어에만 동의한다. 자살은 대부분 우울증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보통상식이다. 죽겠다는 사람이 있나 내 주변을 살펴보자. 그의 죽음을 바라보며 요즈음 우울감이 더해지는 듯하다. 그래서 내게 명령하고 있다. 

“그러지 마라! 저 넓은 운동장으로 나아가라. 너를 다시 창조하라. 앞을 향해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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