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강정의 

[당진신문=강정의]

참고 견디면 새날이 옴을 믿는게 무상한 이치인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지금 우리는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이 풍진 세상에 온 봄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병 때문이다.

이렇게 온 세계가 불안하고 어떠한 희망을 찾아야 할 때 불교에서 말하는 하늘나라와 극락(極樂)세계는 도대체 어떤 세계이며 또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인간존엄성의 상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 여러 종교들이 상대에 대해 공부를 하고 이해를 하여 세상 사람들을 위한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자신들이 신봉하는 종교에 대해 더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글은 지금까지 모르고 지내던 불교의 한 면을 본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읽어 보시면 좋겠다.

인간을 위한 구원의  종교도 있고 또 깨달음의 종교도 있다. 불교는 고대 인도에서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온 아리안족의 베다 신앙에서 시작된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종교다. 오랜 역사를 가진 불교에서는 하늘나라와 극락세계를 구별하고 있다

하늘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욕계·색계 ·무색계의 삼계로 보고 그 세계들 속에 각각의 하늘 세계가 여러개씩 있다고 보며 그 세계는 인연에 따라 윤회하고 있는 세계로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색계 6천·욕계 1만8천·무색계 4천의 모두 2만8천으로 되어있고 욕계의 제일아래인 사천왕천부터 제일 위 28번째의 하늘인 비상비비상천까지 중층구조를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하늘나라는 다 마음이 지어내고 있는 것으로 살아있을때 갈 수 있다는 이론을 생천설(生天說)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삼계의 하늘세계는 인연에 따라 모두 변하고 바뀌는 생멸이 있는 유위법의 세계로  어떠한 하늘세계에 갔어도 그 인연이 다하면 돌고도는 세계로 그러한 세계를 윤회의 세계라고한다.

산꼭대기로 죽어라하고 돌을 굴려 올려놓으면 다 올라가서 또 아래로 굴러떨어진다는 고대  그리스신화에서 나오는 시지프스의 헛된 노력이 그런 윤회의 내용이다.

그 예의 하나로 욕계의 하늘나라인 타화자재천은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며 사는 즐거움이 있는 하늘세계이다. 즉 욕심쟁이들도 그 나름대로 즐겁게 사는 세계가 있고 그러한 세계를 그들의 하늘나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색계에 살면서도 욕심을 비우면 조용한 선정의 세계에 들어가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데 그 마음자리를 두고 하늘나라에 태어났다고 한다. 

법정스님은 생전에 종종 법문이나 글로써 홀로 사는 즐거움을 말씀하셨다. 하늘세계의 28번째 맨 위에는 비상비비상천이라고 하여 세상을 모습도 아니고 또 모습이 아닌 것도 아닌 중도적인 생각으로 사는 하늘 세계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적인 생각이란 수학적인  중간이라는 뜻이 아니고 모든것을 인연법으로 보는 깨달음을 말한다.

그런 세계는 육체적인 욕망을 달성해서 얻는 즐거움이 아니고 욕망을 비움으로써 느낄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즐거움이 있는 하늘 세계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러한 최고의 즐거운 세계 역시 다음에 설명할 극락세계에는 다다르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극락세계는 간단히 말해 깨달음의 세계를 말한다. 그 세계는 즐겁다는 것 보다도 진리의 깨달음에서 오는 마음이 편한 세계를 말한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하늘세계는 즐거운 세계를 말하는데 그러한 하늘세계는 좋을 때가 있으면 좋지 않을 때가 있고 또 좋지 않다가도 좋을 때가 있는 변하는 세계로 극락세계는 변함이 없는 늘 마음이 편한 세계를 말한다. 마음이 늘 편하다는 말은 좋다 나쁘다는 분별심을 떠난 본래의 마음 자리를  말한다.

불교심리학인 유식학(唯識學)에서 말하는 맑고 때가없는 마음 청정무구식(淸淨無垢識)인 직지인심(直指人心)과 칸트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이 그러한 분별심이 없는 순수한 인식자체의 마음 자리를 말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모든 사람은 그러한 일심 또는 한마음이라고 말하는 맑고 깨끗한 청정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게 유식학의 핵심이론이다. 진리를 깨달으면 그러한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실천하는 지혜의 삶을 살게 된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은 우선 독화살을  빼는게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삶은 늘 어려움의 연속으로 고해(苦海)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고해를 벗어나 편안한 세계를 찾아 사는것이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고해에 극락의 세계가 있음을 아는게 깨달음이다. 극락은 다른 말로 니르바나 또는 열반 과 적멸이라고 하며 그 참뜻은 욕망의 불이 다 꺼진 상태를 말하고 그런 상태에서 나오는 깨달음의 지혜를 보리(菩提)라고 한다.

깨달음의 세계가 그러한  열반의 세계라고 볼 수가 있다. 깨달음의 세계인 극락은 오고 감이 없는 마음의 세계인 법신(法身)의 세계이다.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는 모든 사람의 각자 마음속에 다 갖고 있다. 귀한 보물이 아닐 수가 없다. 그러나 그처럼 좋은 보물이 자기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한평생 살아가는게 보통사람들이다.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인생이란게 덧없는데 덧없는 줄 모르고 끝까지 덧 없는 것 들에 집착을 하며 살다가 일생을  마친다.

모든 것들이 다 무상함을 느끼는 단계가 색계하늘의 처음단계인 초선정의 하늘세계이다. 초선정인 그런 하늘세계에만 들어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고요함을 즐길 수 있다. 소위 마음을 비우고 산다고 하는 말들을 하는데 초선정이 그러한 마음의 고요함을 즐기는 하늘나라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덧없음을 깨닫게 되면 욕망을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포기는 깨달은 사람들의 특성중  하나다. 욕망의 덧 없음을 알아차리고 욕망을 잠시 멈추고 포기하는 마음을 지혜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는 사람들에게 욕망의 절제와 포기가 얼마나 지혜로운 행동인가를 실감하게 한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포기는 욕망을 참는 것이며 덧없는 욕망과 거리를 두는 지혜이고 한층 더 위의 하늘로 올라가는 수행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도를 닦는 구도자들인 수행자들은 늘 스스로 계(戒)를 지키는 생활을 한다. 계는 욕망이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억제하고 포기하는 것이다. 음식을 적게 먹고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며 욕심을 내지 않고 모든 것들에 집착을 멀리하는 심리적인 거리두기 등이 다 계이다.

필자는 최근에 쓴 졸저 ‘허 허 참 속으며 사는 줄 모른다’에서 덧없는 것들을 덧없는 줄 모르고 속으며 살지 말고 늘 계를 지키며 사는 생활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내용을 썼다. 계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볼 수 있다. 계는 감옥이 아니라 오히려 술취한 코끼리같은 마음을 제어하는 브레이크와 같다. 마음에 브레이크가 없는 사람은 늘 사고의 위험이 있는 생활을 한다.

우리가 인류역사에서 성현이라고 부르는 분들은 한결같이 계를 지키며 사셨든 금욕주의를 주장한 분들이다.

한 단계 한 단계씩 위의 하늘세계로 올라가는 것을 마음을 닦는 수도(修道)라고 하며 그러한 길을 가는 이들을 수도자들이라고 한다.

하늘세계의 제일 위에는 28천의 바로 밑에 있는 27천은 무소유처정천이라는 하늘세계가 있는데 그곳은 영원한 나가 없고 내 것이 없다는 무아와 무소유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하늘세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곳이다. 

‘나’가 없다는 무아는 찰라찰라 변하는 나이기에 고정된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요. 내 것이란게 없다는 것 역시 지금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한때라고 생각하며 살라는 것이 무아와 무소유 사상의 참 뜻이다. 그러한 진리를 깨달으면 자연히 욕망과 집착을 하는 자신의 마음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런 하늘의 세계 역시 인과가 있는 유위의 보이는 세상으로 늘 바뀌고 변하기에 허망하다. 극락은 그런 세계가 아니고 인과가 없는 무위·공의 세상으로 영원한 세상이라고 볼 수가 있다. 허공이 그러한 세상이다. 결론적으로 하늘나라도 극락도다. 자신의 마음이 지어내는  관념의 나라라는 것이  불교의 하늘세계관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一切가 唯心造다라는 말이 그러한 의미다. 모든 것은 다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말이다.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능화제세간(能畵諸世間)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상을 다 그린다. 오늘 이 순간 어떠한 마음을 갖고 세상을 그리며 사느냐가 참 중요하다. 하늘세계와 극락세계는 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지금 우리는 밖으로 전세계적인 전대미문의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다.

모든것은 다 어떠한 인과관계에서 존재하고 또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진리를 보기도 하였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혜의 눈이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모든 것들은 다 어떠한 인과에 의해 변하고 바뀌고 있음을 본다는 말이다.

인과를 본다는 말은 모든 것은 다 변하기에 무상함을 본다는 말이며 곧 진리를 본다는 말이기도 하다. 현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게 깨달음이고 깨달음의 세계는 곧 극락의 세계에  사는 일이 된다. 지금 현실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각자 마음속에는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하늘세계와 극락세계가 있음을 믿고 살아가자는 뜻에서 하늘세계와 극락세계관을 모색해 보았다.

모든 것들은 늘 변한다. 덧 없다. 참고 견디면 새날이 오는 것을 믿는게 무상한 이치인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욕망을 참으면서 지내다보면 이 풍진 세상에 살면서도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을 수가 있다. 

진리의 세계는 희망이 있는 세계다. 변함의 이치인 진리를 깨달으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 된다. 깨닫고 살면 늘 즐겁고 마음이 편한 하늘세계에 태어나 살 수가 있다.

ㅡ아제 아제 바라아제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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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의 칼럼니스트는 -
고대면 출신으로 당진중학교(8회)와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을 거쳐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한 후 현재 서울에 거주하며 비교 종교학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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