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당진신문=김문헌]

영국의 철학자 메리 미즐리가 오늘날의 인간과 여타 생명체를 포함한 존재자를 ‘혼합공동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화마와 지진,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지금, 공동체의 규정 주체라 자임하던 인간은 그 오만한 사유를 전환해야 합니다. 미즐리가 말한 삶을 공유하는 공동체라면 자연생명공동체의 주인이라 자부했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숲 밖으로, 숨 밖으로, 물 밖으로, 땅 밖으로...... 이 순간에 괜한 종교적 종말론을 거들먹거리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킬 뿐만 아니라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간 자연과 공존하지 못하고 오히려 착취해왔던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서 자연이 자기 자신의 억눌렸던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자연을 신비화하거나 자연이 인간에게 위해를 가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재정향하려는 시도도 시의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기후의 위기가 급박하게 발생할수록 다시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이에 사회생태론자이자 에코 아나키스트인 머레이 북친은 인간 이성 능력을 신뢰해야 할 것을 부르짖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의식을 갖는다는 뜻이고, 의식적으로 실감나게 자연계와 사회의 능동적인 행위자로 참여한다는 의미이다...계몽된 휴머니즘은 사회를 이성적[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지혜롭게 만들어주고, 윤리적이면서 열정적으로 미래를 조망하게 해준다는 희망찬 메시지다”

공동체의 상보성을 인식하고 공존재적 의식을 갖는 것도 생태적 의식입니다. 생태적 감성의 요청도 개인과 공동체와의 관계를 조율하는 이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성적 인간이라면 자연에 대한 지배자와 사용자 입장을 거두어야 합니다. 식물, 동물, 곤충, 사물 하나 하나에도 지배감각과 수단적 인식이 아니라 공동체적 감각, 곧 함께-있음의 상호주관적 존재임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그들이 곧 나(우리)라는 인식은 종교성이나 철학적 지혜가 아니더라도 깊은 이성적 숙고를 하는 인간이라면 자연에 대한 역지사지, 연민, 동병상련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무엇이든 의심할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이렇게 의심하는 자기가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개의 진리를 통해 명증적 직관을 얻으려는 시도는 탁월한 철학적 식견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명증적 직관, 곧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려면 우선 생각하는 존재, 사유하는 행위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파스칼이 인간을 공허와 위대함의 혼합물로서 ‘생각하는 갈대’라고 본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지만 파스칼은 말합니다. “이 끝없는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는 무섭다” 

이 침묵이 깨지고 있는 존재자의 아우성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때가 또 있었을까요? 숲에서 내쫓긴 동물들, 죽어버린 생명체들, 수많은 나무와 식물들, 익명의 곤충들, 바이러스로 죽어간 사람들...... 이제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동식물이 사라진 곳에는 인간도 살 수도 없습니다. 월든의 숲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만났던 바다는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생명적 타자의 시선을 만납니다. 숲에서, 동물에게서, 곤충에게서, 식물에게서, 나무에에게서, 물에게서...... 그 타자는 지금 인간을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환경적 지옥, 생명적 공간과 관계적 공간의 지옥이 되어 버린 생명공유 공간을 서로 자유로운 공간으로 만들어가야 할 선택을 해야 합니다. 지금의 지옥과 같은 자연환경을 파악하고 더 나은 자연환경 공동체를 향하여 선택하는 그 기도를 품은 인간 자신을 앞으로 내던지는 기투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자연환경공동체를 동일한 생명들의 향연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되도록 적극적인 앙가주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식물이, 동물이, 자연이 파괴된 공존재적 공동체의 복원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그저 협력만 할 뿐, 그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생명들이 어우러지는 ‘혼합공동체’가 유지되려면 각각의 개별적 존재자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싸잡아서 뭉뚱그려 공동체를 먼저 고려하여 구성원들의 개별 의지를 묵살하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혼합적 생태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별적 존재자의 생명의지는 동일하고 수평적입니다. 소중하지 않은 생명적 존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시고 숨 쉬고 먹고 불을 밝히고 휴대폰과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익명의 존재자가 내게 준 희생과 자비, 그리고 죽음과 사라짐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혼합적 생명공동체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사라짐의 기적을 통해 계속 탄생(생성)하도록 도왔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은 사람은 자연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산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개별적 생명은 다 우주적 큰 생명의 나타남이라는 것입니다. “나무는 땅을 향해 올리는 기도요 찬송이다. 하늘에서 내린 것에 제 마음을 넣어서 돌린 것이 숲이요 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하늘은 더 부드럽고 기름진 것으로 준다. 숲이 우거질수록 점점 더 기후가 온화하고 윤택해 가고 나무를 벨수록 더욱더 메마르고 사나와진다. 우리 정신도 마찬가지다. 머리 위의 저 푸른 하늘은 우리 정신의 숲이다.” 함석헌의 말입니다.

정신의 근본은 하늘이요 내 정신이 곧 우주적 재산이라고 생각한 에코 아나키스트 함석헌의 생각에 이제 우리가 맑은 얼을 가지고 부응해야 할 때입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이 지구의 난국을 타개해 가기 위해 선택하고 결단을 내릴 차례입니다. 사느냐(존재) 아니면 죽느냐(비존재) 하는 기로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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