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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진신문 역사산책] 당진면 만세운동과 동학의 후예들Ⅰ

2018. 11. 22 by 당진신문
옥파 이종일 선생
옥파 이종일 선생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은 동학농민혁명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내포지방을 휩쓸고 지날 때 당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진과 면천으로 나뉘어 있던 갑오년의 당진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회오리가 요동쳤다.

이렇게 변화를 갈망했던 당진 사람들에게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나라를 빼앗기고, 좌절했을 것만 같았던 당진사람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반드시 자주독립국가를 쟁취하겠다는 의지로 동학을 실천했던 당진사람들은 1919년 3월1일 전국으로 번져간 3.1독립 만세 소리를 당진에서도 울려 퍼지게 했다. 1919년 3월10일의 일이다.

이렇듯 당진에서 벌어진 3.1독립 만세 시위는 동학의 후예인 천도교의 역할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동학이 천도교로 합법화된 이후 충남에서 대교구가 설립된 곳은 당진과 서산 두 곳이었다.

이렇게 당진에 천도교 대교구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내포지방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실패에 따른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 했던 곳이 당진이었다는 측면과 손병희 선생이 1년 3개월간 피난살이를 하며 대도소를 운영했던 곳이 당진 수청리였던 영향이 컸다.

이렇듯 천도교 당진 대교구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은 당진에서 전개된 3·1독립 만세 시위에 천도교인들의 참여와 역할이 있었던 것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3.1혁명은 천도교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전국의 천도교인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하여 주도하였던 것이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충남에서 벌어진 3.1독립 만세 시위 중에서 천도교인들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고,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하여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곳이 당진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독립운동사료』에서는 1919년 3월10일 당진면에서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천도교 당진교구 교인들이 당진면 읍내리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미수에 그친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당진면 읍내리에서는 3월16일에도 시위가 계획되었는데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하지는 못하였다. 당진면에서 준비되었던 시위 계획에 관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실체적 상황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것이 천도교 당진교구에서 준비되었던 만세시위였다는 증언으로 볼 때, 천도교의 조직적 참여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진면 3.10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천도교 당진교구는 1911년 교구가 설치된 이래 지속적인 성장을 하여 1914년에는 대교구로 성장하였다. 당진의 대교구장은 김병태였고, 교구장은 이용의, 김동후, 장흥환, 차동로, 신태철이었다. 3.1혁명이 일어났을 때, 천도교 당진교구는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령에 따라 3.1독립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독립선언서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독립선언서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천도교의 조직적인 3.1독립 만세 시위는 손병희의 지휘에 따라 이종일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종일은 충남 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독립선언서」를 직접 제작하고 배포한 당사자였다. 당시 이종일은 「독립선언서」 배포를 위해 믿을 만한 천도교 신자를 동원하였다. 이때 동원된 천도교 신자 중 이경섭은 서북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되었고, 인종익은 충남북과 전북의 천도교 교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청주에서 체포되었다.

물론 인종익이 당진교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는 진술은 없었다. 그리고 이종일이 충남지방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데 인종익 한 사람만을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천도교가 이종일을 통해 조직적으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고, 천도교 조직을 동원하여 3.1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려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침에 따라 전국의 천도교 교구는 조직적으로 3.1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중 당진교구도 천도교 당진교구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당진면 읍내리에서 1919년 3월10일 독립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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