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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신문 역사산책] 3.1혁명에서 찾은 심훈의 또 다른 이름 심대섭Ⅳ

2018. 10. 24 by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일찍이 경성고보에서는 3.1혁명에 가담하였다 체포된 심대섭에 대해 “영리하나 경솔하여 모든 명령 등을 확실하게 실행하지 않는다. 게으른 편이어서 결석·지각 등이 많고 평소부터 훈계를 받아 온 자이다”라는 평을 일제 경찰에 제공한 바 있다.

경성고보가 심대섭을 평가하였던 대로 3.1혁명에 참여한 것을 이유로 경성고보에서는 그를 퇴학시켰지만, 심대섭 또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는 것으로써, 그들이 자신을 평가한 것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사진출처 한국문화재단
사진출처 한국문화재단

심대섭이 망명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1920년 겨울의 일이다. 후일 심대섭은 “필경사잡기”에서 이때의 일을 “어색한 청나라 복장으로 변장하고 봉천을 거처 북경으로 탈주하였었다“고 기록하였다. 

심대섭의 중국 망명 생활은 1920년부터 3년간 이어졌다. 심대섭은 만주에서 북경으로 가서 우당 이회영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우당 이회영은 조선에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을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일에 많은 재산을 투여했지만, 그래도 북경 생활은 어느 정도의 재산이 남아 있었던 때라 조선에서 망명해 오는 청년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런 인연으로 심대섭은 북경에서 한 달 여를 우당 이회영과 함께 지냈다. 우당 이회영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저항하며 중국으로 망명한 심대섭을 무척 아꼈다. 심대섭이 연극 공부를 하려고 프랑스 유학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강경히 반대하며 “너는 외교가가 될 소질이 있으니 우선 어학에 정진하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회영의 부탁은 간곡했지만 끝내 따르지 못했던 심대섭이었다.

이후 심대섭의 모습은 외교관을 연상케하는 안경을 쓰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회영의 간곡한 부탁이었던 외교관과 관련이 있었으니 우당의 청을 모두 외면했던 것은 아닌 셈이다. 이밖에도 심대섭은 중국에 망명하여 있는 동안 아나키스트이자 민족사학자였던 단재 신채호, 임시정부를 이끌던 이동녕과 이시영, 엄항섭과 사회주의 계열의 여운형 같은 지사들 곁에서 많은 감화를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심대섭은 중국에 망명하여 처음에는 북경대학 문과에서 극문학을 전공하려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에서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술의 나라인 프랑스 일류의 극장과 화려무비한 오폐라 무대를 몽상하며” 프랑스로 가기 위해 상해로 갔지만 프랑스까지는 가지 못했다.

심대섭은 결국 항주의 지강대학에 입학하여 졸업하지 못하고 1922년까지 수료하였다. 상해에서의 망명생활은 같은 시기에 상해로 망명했던 경성고보 동창이자 후일 조선공산당 당수이던 박헌영을 비롯하여 임원근 등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였던 시기였다.

심대섭이 박헌영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특히 귀국 후 동아일보에 함께 입사하였던 점이나, 박헌영과 함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통해 보면 심대섭이 박헌영과 얼마나 깊은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런 이유로 심대섭이 상해로 갔던 진짜 이유가 프랑스로의 유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해에 있던 사회주의자들과의 교류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심대섭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던 것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상해로 망명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갖고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심대섭 또한 이런 현상에 따라 사회주의를 경험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심대섭이 프로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내세운 염군사의 연극부에 가담한 것이나,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던 점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20대 초반을 중국에서 망명살이를 하면서 독립운동과 예술활동 사이에서 고뇌하던 심대섭은 23세 되던 1923년에 귀국하였다. 귀국한 이후 심대섭은 극문회를 조직하는 등 본격적인 국내활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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