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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 역사산책] 3.1혁명을 지원하고 참여한 순성출신 강선필Ⅱ

2018. 08. 31 by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경성에서 3.1만세 시위가 벌어졌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강선필은 1919년 3월7일 아버지와 함께 고향인 당진 순성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경성에서 순성으로 귀향한 것은 강선필의 뜻이라기보다 아버지의 뜻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경성에서 유학 중이던 많은 학생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발적으로 귀향하였다.

고종의 인산(장례식) 사진
고종의 인산(장례식) 사진

이렇게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던 것은 학교가 휴교하였던 점도 있었지만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모들의 뜻에 따랐던 점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은 경성에서 3.1혁명이 일어났고 유학생들이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상경하였다. 부모들은 자식이 3.1혁명에 가담하였거나 가담할까 걱정하였다. 불안한 정국속에서 경성에 있는 자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자식을 데리고 귀향하는 것 말고는 다른 최선의 방책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강선필의 경우는 마침 아버지가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상경하였다. 강선필의 아버지는 경성에서 3.1혁명의 실체를 목격하였고, 독립을 요구하는 다수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가담하거나 연행되는 모습도 목격하였을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독립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였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자식을 경성에 남겨두어서 생길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예측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강선필은 아버지와 함께 귀향하였다.

하지만 강선필 부친의 뜻과는 달리 강선필은 3월 중에 다시 경성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본인의 뜻과 관계없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강선필이 체포된 이유는 강선필의 친구들인 경성고등보통학교 박노영, 박수찬 등이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는데 그 격문 제작 비용을 강선필이 제공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제작 배포한 격문의 내용은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3.1혁명에 적극 가담할 것을 선동하는 내용이었다. 일제로써는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일제 경찰은 즉각적으로 박노영과 박수찬 등을 체포하였다. 이들이 체포된 것은 3월8일의 일이다. 이를 감안해 볼 때 강선필의 체포 시기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략 3월 10일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박노영은 김백평, 박쾌인과 더불어 경성고보를 대표하여 3.1혁명을 주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3.1혁명이 본격화되자 3.1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박노영은 독립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3월 3일까지 매일같이 경쟁적으로 나돌던 격문이 어찌된 일인지 3월 4~5일 사이에는 시중에서 볼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격문을 보고 3.1혁명에 참여하였고, 격문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몇 일째 격문이 발행되지 않자 박노영은 자신이라도 나서 격문을 제작하여 배포하기로 하였다.

우선 함께할 동지가 필요했다. 경성고보 같은 반 친구인 박수찬과 평소 알고 지내던 김세룡, 방재룡, 김한탁 등과 함께 상의하여 격문을 만들기로 했다. 다음은 격문이 문제였다. 모두 격문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고 문장에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박노영은 같은 함북출신의 선배인 경성의전 한위건에게 부탁하여 격문을 받았다.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내용과 독립을 위해 3.1혁명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내용의 격문이었다. 인쇄에 필요한 등사기는 김세룡이 구해왔다.

그러나 격문을 인쇄할 종이가 문제였다. 종이가 귀했던 시대에 격문을 인쇄할 종이를 사기에는 고학생에 지나지 않았던 함경도 출신의 유학생으로서는 종이 값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자금을 강선필이 제공했던 것이다. 강선필은 가까이 지내던 박수찬을 통해 학생으로서는 거금인 10원을 전해 주었다. 강선필에게서 받은 자금으로 등사에 필요한 종이와 잉크를 산 청년들은 3월7일 김세룡의 집에 모였다. 밤이 늦도록 필사를 시작하여 등사를 끝마쳤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이렇게 제작된 격문은 총 800매였다. 제작된 격문은 다음날 김세룡 박수찬 등에 의해 경성시내에 배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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