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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경성고보를 대표하여 3.1혁명에 참여한 당진출신 박쾌인Ⅳ

2018. 06. 29 by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천주교 용인공원
천주교 용인공원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 10년만에 터진 3.1혁명은 수많은 청년학생들을 각성하게 했다. 많은 청년학생들이 3.1혁명에 참여했고, 당진출신의 경성 유학생 박쾌인 또한 3.1혁명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나라 잃은 식민지 청년학생에게 부과된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는 뜻이고, 박쾌인을 비롯한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이를 수용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일제 당국의 입장에서는 박쾌인과 같은 부류의 청년학생들은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불온한 사상을 가진 ‘불량선인’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이에 따라 일제는 박쾌인이 3.1혁명에서 만세를 부르고 학생조직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준 행위가 보안법 및 출판법을 위반했다고 하여 구속하였다.

재판 결과 이 사건으로 함께 구속된 김형기, 윤자영는 징역 1년, 김극평, 장기옥 등은 징역 10월, 박쾌인도 김철환, 박인옥과 함께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그 결과 박쾌인은 8월의 징역과 120일의 미결 구금 기간을 합하여 1년 1개월이 넘는 기간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만기 출소한 박쾌인은 당진으로 귀향하였다. 하지만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한 이후 박쾌인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일제의 신문조서에 밝히고 있듯이 “장래 독립할 시기가 오면 또 운동할 작정이다“라고 했던 결의와는 다른 행보였다.

당진으로 귀향한 박쾌인의 행적에 대해서는 ‘출감 후 당진으로 내려와 당진객사(당진공립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을 교육하다가 당진향교 명륜당으로 이동하여 다시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그의 행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증언으로 확인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박쾌인이 당진에 살았다는 존재 자체를 알 수 있는 증언도 없다. 일제강점기 당진면 읍내리는 매우 작은 마을에 불과하여 당진면에 살았다면 활동 여부와 관계없이 그의 행적에 대해 증언할 사람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진 읍내에 살았던 생존자를 추적하여 박쾌인을 알아 보았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박쾌인이 당진에 살지 않았거나 눈에 띄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2007년 남북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통해 박쾌인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나왔다. 2007년 7월16일자 『매일경제』 기사에는 북한의 박명규가 당진면 읍내리에 살고 있던 부모형제를 만나기 위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박명규는 박쾌인의 아들이고 당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생이었는데 월북하여 살고 있다가 2007년에 이르러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한 것이다. 박명규가 신청한 기록을 보면 박쾌인은 3년 연하의 이기월과 결혼하여 4남1녀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또한 박명규가 가족과 헤어지기 전의 주소가 당진면 읍내리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박쾌인이 최소한 1945년 해방 이후까지 당진면 읍내리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박쾌인이 당진에 귀향하여 살았던 것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박쾌인은 당진에 거주하면서도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을 거치는 동안 행적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사회활동에 소극적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런 박쾌인은 1950년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은 천주교 용인 공원 묘원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박쾌인의 공훈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모교인 경기고등학교에서는 2007년 10월 2일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박쾌인은 3.1혁명에 주체적으로 참여한 청년학생이었다. 비록 나이 어린 학생이었지만 박쾌인은 암울했던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독립운동에 함께하여 당당하게 조국의 독립을 외쳤다. 이러한 학생운동의 자주독립 정신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사회변혁 운동으로 우리 사회를 진일보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박쾌인은 학생운동의 깨어 있는 청년학생이었고, 자주독립 쟁취라는 3.1혁명 정신을 빛낸 인물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당진출신 독립운동가로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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