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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지 말자 한 표

2018. 04. 09 by 이선우 객원기자

“버리지 말자 한 표”,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정당한 사람에게”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선거홍보 전단의 문구들이다. 1919년 3ㆍ1 운동이라는 강력한 저항을 경험한 일제는 지역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지방자치에 손을 댔다. 이름 하여 ‘조선인에 의한 지방자치 실현’을 전면에 내세우고 부ㆍ면 협의회, 도평의회 등의 자문기구를 새롭게 설치했다. 그리고 특별히 식민지 조선의 2등 국민에게도 선거권을 주고 의회에서 활동할 의원을 선거로 뽑도록 했다. 겉으로 보기엔 차별을 완화하고 권리를 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식민 지배체제를 강화하며 친일파 육성에 공을 들였다.

3ㆍ1 운동 얼마 뒤 총독으로 조선땅을 밟은 사이토 마코토는 첫 시정 발표에서 “힘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조선인의 지위를 일본인과 동등하게하기 위해 문화통치를 실시한다”고 선언했다. ‘문화통치’라는 단어는 늑대의 야욕을 감추는 양의 탈 일 뿐이었다. 신명을 바칠 친일 인물을 물색해 양반, 귀족, 유생, 부호, 실업가, 교육가, 종교가들에게 침투시켜 친일 단체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다.

각종 종교단체에 친일파가 최고 지도자가 되게 한 다음 일본인을 고문으로 앉히는가 하면 양반ㆍ유생으로 직업이 없는 자에게 생활방도를 만들어주고 이들을 선전과 민정 정찰에 이용했다. 조선인 부호에게는 노동 쟁의, 소작 쟁의를 통해 노동자, 농민과의 대립을 인식시키는 한편 친일적 민간인에게 편의와 원조를 제공하고 수재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친일 지식인을 키워냈다.

그런 가운데 1920년 11월 20일, 이 땅 최초의 근대식 공직 선거가 치러진다. 지역의 인구수나 규모가 아닌 일본인 거류지의 존재나 거류자수에 따라 행정체계를 개편해놓은 일제는 선거 역시 일본인이 다수 모여 사는 항만지역의 신흥도시인 12개 ‘부’와 24개 ‘지정면’에서만 하도록 제한했다.

또한 연간 5원 이상(일본인은 3원) 납세하는, 25세 이상 남자 조선인에게만 선거권을 주었다. 부에서는 1000명 중 12명, 지정면에서는 1000명 중 8명에 불과했다. 일부 친일파와 지역 유지 같은 극히 소수만이 가질 수 있었던 선거권은 각종 이권과 혜택이 주어지는 위세와 특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3년마다 치러진 선거는 갈수록 경쟁이 심해져 주식 향응, 물품 공여 등을 단속하는 규정을 둘 정도였다. (식민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시행된 이 시기 ‘지역 유지 정치’는 왜곡된 모습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6ㆍ13 지방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국민의 절반이 투표장에 가지 않을 정도로 투표율이 낮다는 이야기가 또 회자될 판이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과 함께 공표된 헌법 가운데 제 5조에는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음”이라 명시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영국과 미국에서도 당시로서는 인정받지 못하던 여성 참정권까지 포함된다. 우리에게는 이미 가지고 있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소중한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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