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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교수

도이리(桃李里)

2018. 03. 26 by 당진신문

남이흥 장자 의풍군(宜豊君)이 모친과 함께 낙향 후
섬에 복숭아와 오얏나무를 심어서 도리섬(桃李島) 유래

도이리(桃李里)는 원래 해미군 서면(西面)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서면(西面) 상도리(上桃里), 전동(箭洞), 애동(艾洞), 하도리(下桃里), 하두리(下杜里)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이리라 해서 서산군 대호지면(大湖芝面)에 편입되었다가 1957년 11월 6일 법률 제456호에 의해서 당진군에 편입된 마을로 신동(新洞) 간사지를 간척하기 이전에 바다가운데 섬이 있고 그 섬에 복숭아(桃)와 오얏나무(李)가 많이 있어서 도이섬(桃李島)이라 칭한데서 유래했다.

남중우의 「도호의숙」에 의하면, 도이(桃李)란 지명은 남이흥의 장자인 의풍군(宜豊君) 남두극(南斗極)이 모친과 함께 낙향한 후 작은 섬에 복숭아와 오얏나무를 심고 도리섬(桃李島)이라 명명한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이흥 장군의 후손들을 ‘도리섬 남씨’라고도 부른다. 도이리(桃李里)  부락 안에는  작은 자연마을들이 여럿 있다.

강당골은 종숙으로 시작된 명문사학 도호의숙이 있었던 지역에서 유래했고, 마명동(馬鳴洞)은 준마를 기르던 곳으로 지금도 ‘말울리’라 부른다. 궁시(弓矢)를 만든 전동(箭洞)은 ‘살곶이’라 부르고, 무예를 닦던 궁평(弓坪)을 지금도 ‘활울이 들’이라 부른다. 또한 궁평 동쪽에 동각골이 있고, 서쪽에는 서각골이 있는데, 이는 동서 궁각(弓閣)이 있어 연유된 지명이다.

의령 남씨가 대호지에 세거하게 된 것은 남이흥의 증조부인 남세건(南世建)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을 때 관내 순행 중 해미현 서면에 속해있던 도리 땅을 자손을 보존할 수 있는 길지라 하여 점지한 이후라고 전해진다. 남세건은 문음(門蔭)으로 참봉이 되었다가, 중종 2년(1507)에 진사시에 3등으로 입격하고, 중종 19년(152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 직제학이 되고 그후 1535년 우승지가 되었다. 1536년 병조참판에 이어 충청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호조 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하고, 1541년 전주부윤, 1542년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1544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인종이 즉위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호조 참판이 되고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5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사은 겸 주문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1546년 형조 참판에 이어 이듬해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1548년(명종 3) 경기도 관찰사로 나가 흉년으로 인해 곤핍해진 민생을 돕고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또한 충효한 사람 및 절개를 지킨 부녀자들을 포상할 것을 왕에게 상소하였다. 1549년 공조 참판이 되고 이듬해 대사성, 호조 참판이 되었다. 1551년 특진관이 되어 저화(楮貨)를 사용하자는 당시의 의논에 대하여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으며 이전에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남세건의 사후에도 도이리 땅은 워낙 오지인 벽지여서 그의 장자인 남응운(南應雲)은 관심이 적었다. 남응운(자: 致遠, 호: 菊窓)은 예조 참판을 지냈다. 둘째 아들인 남응룡(南應龍)이 휴양지로 삼아 이곳 대호지를 왕래하였다. 남응룡(1514년―1555년)의 자는 경림(景霖), 호는 이요당(二樂堂) 또는 요산(樂山)이다. 할아버지는 삭령 군수 남변이고, 어머니는 이윤식의 딸이다. 그는 진사로 22살인 1535년(중종 30) 알성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겸 저작을 지냈다. 명종 4년(1549)에는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1550년 예빈시 정이 되고, 지제교 겸 승문원 참교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성균관 사성을 거쳐 1552년 5월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퇴계 이황선생과 호당에서 왕세자를 가르쳤다. 그러나 1555년(명종 10) 41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남응룡의 묘비에 퇴계가 찬한 내용과 제문이 있고 퇴계 문집에도 몇 편의 이요당에 관한 시가 있다.

후에 손자 남이흥의 공적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묘소는 처음에는 광주의 음촌에 모셨다가 1971년 3월 대호지면 도이리에 이장하였다. 남응룡은 남황과 남유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인 남황은 사축서(司畜署) 별제(別提)를 지냈다. 남유는 남응룡의 둘째 아들이다. 지금의 대호지면 일원과 천의리, 승산리 일대인 해미현 서면을 남유와 남이흥의 사패지로 하사받게 된다. 이후 도이리를 비롯한 대호지 일대에는 충장공(忠壯公) 남이흥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남이흥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장자인 두극(斗極)이  도이리로 옮겨 살게 되면서 대호지 일대는 의령 남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남두극은 선조 34년(1601년) 11월 출생하여 인조 3년(1625년) 25살 나이에 어모장군이 되었다. 그는 충장공이 순절한 이후 칠원(柒原) 현감에 특별 제수되어 이후 인조, 효종, 현종 3대에 걸쳐 면천 군수, 단양 군수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묘소도 충장공 남이흥의 묘까지는 경기도 광주(현 성남시)에 있었으나, 남두극의 묘부터 도이리 관창산(觀滄山)에 있었음을 보아 그 때부터 충장공 후손들이 도이리에 정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남이흥의 손자인 남영(南泳)은 인조 10년(1632년) 4월에 출생하여 통훈대부 장흥고 직장을 지냈다. 그의 묘 역시 관창산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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