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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조선 청년의 기개를 떨친 일본 유학생의 2.8독립선언!!!

2018. 03. 19 by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사진은 2.8독립선언의 주역들.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 사진은 2.8독립선언의 주역들.

파리강화회의를 독립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단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독립을 청원하는 서한을 보내 독립을 호소하는 것으로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조선이 강도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청원을 넘어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구체적인 실천이란 바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벌이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상해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이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弟는 이미 두 兄들에게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호소할 것을 청했으니, 諸兄들은 모름지기 때를 맞추어 국내에서 우리 겨레의 전국적 민중운동을 일으켜 일본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한다는 굳은 결의를 표시하여 국제적으로 선전에 이바지하시오.

신규식이 국내에 있는 독립운동가에게 보낸 이 비밀 서한은 상해에서 활동하던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공통된 의견으로 신규식이 방효성과 곽경을 국내에 보내 전달한 것이다. 이 서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파리강화회의를 조선 독립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이고,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국내에서 일제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한다는 뜻을 전국적 민중운동으로 일으킴으로써 국제적으로 선전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바로 독립선언으로 나타났고, 3.1혁명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가장 먼저 독립선언을 발표한 것은 일본에 유학중이던 청년학생이었다. 재일 유학생들은 동경을 비롯한 일본 각지에 유학하는 동안 온갖 차별을 당하였다. 또한 이러한 차별의 경험은 식민지 청년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고,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해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에서 유학중이라는 사실이 국제정세의 흐름과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조건이었기에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국내외에서 조선독립을 호소할 대표를 파견하려 한다는 소식도 알 수 있었다. 이 때 상해에서 파견된 장덕수가 일본에 찾아왔다. 장덕수는 일찍이 일본에서 유학한 바 있어 유학생들에게는 선배의 위치로 재일 유학생들에게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이 구상하고 있는 뜻을 전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렇지 않아도 국제정세를 예의주시하며 조선독립을 위해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고 있던 재일 유학생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재일 유학생들은 곧바로 회의를 열어 독립선언을 발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를 위한 준비작업으로 1919년 1월7일 최팔용, 백관수, 최근우 등이 주축이 되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는 한편, 이광수로 하여금 선언문을 작성하게 했다. 선언문이 완성되면서 유학생들은 활동방법을 고민한 끝에 두 방향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했다. 하나는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2월8일에 결행한 2.8독립선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독립선언서 작성자인 이광수를 1919년 1월31일 상해로 보내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의장인 클레망소(G.E.B. Clemenceau)에게 선언서를 전보로 발송하였다. 또한 일본에서는 일본주재 각국 대사관을 통해 여러 나라에 선언서를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의 각 대신 및 신문사 등에도 선언서를 보냈다. 그리고 이 보다 앞선 1월21일에는 송계백을 국내로 보내 현상윤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국내의 인사들에게도 전달하였다.  

송계백이 전한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는 조선독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에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독립을 위한 험난한 길에 해외의 청년학생들이 앞장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분발을 촉구하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상해와 일본에서의 소식은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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