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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교수

태봉산(胎封山)

2017. 12. 18 by 당진신문
500년전(1739년) 영조의 딸 아기씨 태실 표석
500년전(1739년) 영조의 딸 아기씨 태실 표석

약 500년전(1739년) 영조의 딸 아기씨 태실
순성면 성북리 태봉산에 파손된 채 방치,복원 시급

순성면 성북리에 가면 태봉산(胎封山)이 있다. 지금까지 당진 지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야트막한 야산이다. 그러나 이 산을 노인들이 오래전부터 태봉산이라고 불러왔다. 지금까지는 무관심하게 방치되어오던 것을 필자가 최근에 순성면지 발간에 참여하면서 새삼 그 가치의 중요성을 알고 여기에 소개한다. 이산을 태봉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기옹주(한자는 아지)의 태를 묻은 태실과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표석이 서있기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작은 돌방으로 전망이 좋은 양지바른 산의 정상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표석은 순성초등학교 안 정원으로 옮겨져 있고, 태실은 받침돌 위에 태를 넣은 둥근 몸돌을 올리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바깥에는 난간을 둘러놓았는데, 어느 때인가 도굴꾼들이 파괴하여 속에 묻혀있던 항아리는 없어졌고 주변에 태실을 만들 때 사용한 부재들만  여기 저기 흩어져 산에 있다. 그 옆에는 대좌(臺座)와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를 갖추고 있는 표석이 있었는데 순성초등학교로 옮겨 놓은 것이다.

표석에는 乾隆五年九月二十九日子時生翁主阿只阿只氏胎室(건륭오년구월이십구일자시생옹주아지씨태실)라고 쓰여져 있다. 건륭은 중국 청나라 연호로 1735년에서 1795년 사이를 말한다.  그러므로 건륭5년은 1739년이다. 즉 1739년 9월 29일 밤11-1시(子時)에 태어난 옹주 아기씨의 태봉표석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영조가 1724년에 즉위 했으므로 영조15년(1739년)임을 알 수 있으며, 영조의 옹주 아기씨 임을 알 수 있다. 옹주는 왕의 딸로, 후궁의 소생이다.

옹주(翁主)는 보통 후궁이 낳은 딸의 작위이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왕의 서녀(庶女)는 물론 대군의 부인, 왕의 후궁, 개국공신의 어머니와 처, 왕세자빈의 어머니, 종친의 딸 등의 칭호로 사용되다가 세종 이후 왕의 후궁에게서 태어난 딸만을 칭하도록 규정되었다. 이 규정은 『경국대전(經國大典)』 「이전(吏典)」 ‘외명부(外命婦)’조에 그대로 법제화되었고, 이후 『속대전(續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에도 변동 없이 유지되었다.

왕비 소생 공주와 후궁 소생 옹주는 보통 아기씨[阿只氏]에서 10세 이전에 고신(告身)을 받았다. 작위를 받으면 왕의 딸로서 외명부에서 품계를 초월한 지위를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다. 예컨대 『속대전』에 의하면, 옹주는 출가하기 전에 녹봉을 받았고, 출가한 이후에도 남편인 부마(駙馬)에게 지급된 녹봉을 간접적으로 받았다.

또한 생전에 800결 규모의 면세결을 지급받다가 죽으면 제사를 위해 필요한 제위조(祭位條)로 200결을 받았다. 그러나 옹주는 공주보다는 지위가 낮았다. 남편은 처음에 종2품의 위(尉)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정2품의 위에 승급되었다. 태실근처에서는 금경(禁耕)하게 되어있는데 그 금표(禁標)는 대왕태봉(大王胎峯)은 300보(步)로 왕자와  여러 아기씨(阿只氏)의 태봉은 100보로 금표를 수축정계(修築定界) 하였다.

『고려사(高麗史)』 「백관(百官)」 ‘내직(內職)’에 따르면, 고려 현종 때 왕의 첩에게 귀비(貴妃)·숙비(淑妃) 등의 작호를 주었고, 정종 이후에는 이들을 원주(院主), 원비(院妃), 궁주(宮主)라 하던 것을 충선왕 때 궁주를 옹주로 개칭하였다. 충혜왕 이후에 후궁의 등급에 구별이 없어지고 사비(私婢)나 관기(官妓)까지도 옹주라는 칭호가 남용되면서 1391년(고려 공양왕 3)에 왕자의 정비(正妃),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되도록 정하였다.

 조선 전 시기에 왕의 딸을 보통 공주와 옹주로 불렀으나, 1428년(세종 10) 내관 제도를 개정하기까지 왕의 후궁과 왕의 딸에게 혼용되었다. 후궁을 지칭하는 작위로서의 옹주는 위계상 궁주의 칭호보다는 하위 호칭이며, 그 지위는 낮았다.
1428년 이후 내관 제도가 정비되고 외명부의 작위가 마련되면서 호칭의 구별이 뚜렷하게 되었다. 이후로 옹주는 후궁의 작위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왕의 서녀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 귀중한 순성면 태봉산의 아지옹주 태실을 복원하여 시민들의 자랑스런 향토문화 유산으로 만들어야한다. 이웃 서산시 운산면 태봉리에도 태봉산(128m)이 있다. 역시 조선 제 13대 왕인 명종태실이 있기에 마을 지명도 태봉리(胎封里)이고 산이름도 태봉산(胎封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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