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훈장 4개 수상한 성장호씨

▲ 성 장 호
6월은 ‘호국보훈의 달’. 올해는 광우병 쇠고기 파동과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이 이어지면서 형식적인 행사마저 그 의미가 퇴색됐다.
특히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한국전쟁의 비극을 점차 잊어가고 있다.


지난해 서울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작업이 이뤄져 뉴스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6.25 한국전쟁 발발부터 휴전까지 생사를 넘나드며 전선에 참여,충무무공과 화랑무공 등 4개를 수여한 성장호씨(81·송악면 복운리 29)로부터 한국전쟁의 궤적을 더듬어 보았다.



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용접기술을 한 1년 배웠지만 국내로 돌아와 보니 일 한 곳이 없더라구. 나라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 48년 10월 입대를 해 이듬해 1월 하사 군번을 받았어. 주특기는 통신으로 대전에서 2개월 정도 지내다가 경기도 옹진 38선 경비대에서 통신병이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고 차출돼 갔지.


서울을 비롯한 후방은 조용했지만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는 남과 북에서 치열한 포격전이 밤낮으로 펼쳐졌어. 양측 모두 기선제압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지.
통신병이 부족했던 시절이라 후임병들이 교육을 마치면 임무을 교대해 줄 것이라는 백인엽 연대장의 말을 고지 듣지 않았는 데 정말 후임병들이 옹진 38선 경비대로 온 것 아니겠어.


50년 6월, 수도사단 18연대로 복귀하니까 연대장님이 그동안 수고 했다며 휴가를 보내줘 당진에서 머물다 귀대하고 10일이 지나니까 6.25 전쟁이 터지는거야.
옹진에서는 포소리를 들었지만 수도 서울에 인민군의 탱크와 야전포가 나타날 줄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구.


18연대 1대대는 삼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지. 지휘계통이 무너지고 부대원들의 생사도 모르는 상황이 된 거야. 어쨌든 함락 일보 직전인 서울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인도교는 끊어졌지 민간인과 군인들이 뒤엉켜 아비귀환이 따로 없는 상황이었어.

동기와 나는 할 수 없이 한강유원지에서 피서객을 대상으로 빌려주는 보트를 타기로 했는데 2-3명이 겨우 탈 수 있는 보트에 너도나도 달려드니 보트는 뜨기도 전에 가라 앉아 많은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어. 할 수 없이 카빈총 한자루만 어깨에 차고 헤엄을 쳐 마포나루 쪽으로 나왔지.


모래언덕에 앉아 동료와 함께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데 소위 계급장을 단 청년이 다가 오더니 아무래도 다시 한강을 건너가야 한다며 포연이 자욱한 서울쪽으로 향하는 거야. 초급장교지만 임무를 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한강으로 내려가는 데 말릴 수가 없더군.

헌병들의 안내로 시흥지구국군전투사령부로 들어갔지. 더는 밀릴 수 없다며 개인 엄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했지만 벌써 인민군은 영등포까지 내려와 시가지를 휩쓸고 있었어.
실탄을 아낀다고 지휘부에서는 적이 가까이 다가올 때가지 사격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새까맣게 몰려드는 인민군을 보고 어떻게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있겠어.


중과부족으로 시흥지구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지.
이후 전선은 속절없이 밀리기만 했지. 안양을 거쳐 천안까지 내려오는 동안 변변한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하고 후퇴만을 거듭했어.


영천을 거쳐 청송과 경주에 머물러 최후의 전선을 펼친 것이 낙동강 전투야.
인민군 주력부대는 최대한의 화력을 동원해 무차별 폭격을 밤낮으로 퍼부었어. 아군은 아군대로 최후의 보루로 삼고 피아간에 치열한 교전이 계속됐지.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어.
음력 팔월 추석 전날이었어. 북진이 시작됐는데 인민군 토치카에 들어가보니 발목을 쇠사슬로 묶어 놓았더군. 도망 못가게 말야.

북진은 빨랐지. 보급로가 끊어진 인민군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어. 서울이 함락된지 3개월 만이 9월 28일 수도 서울을 다시 되찾았고 10월 1일 국군은 38선을 넘었어. 이날을 기념해 국군의 날이 되었지만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더군.


특히 채명신 연대장이 지휘하는 백골연대-지금의 3사단 전신-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지.
그리고 훈련소 다운 훈련소가 제주도를 시작으로 생긴 것도 이 무렵이야.


북진에서 중부전선과 동해안은 국군이, 서부전선은 유엔군이 담당을 했지.
양구 화천을 거쳐 금강산 단발령을 넘어 거침없이 북진이 이뤄졌어. 원산과 나남 흥남 함흥 청진을 거쳐 혜령아래 부령까지 진격했지.


원산을 점령하면서 2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됐지. 하사에서 1등상사가 된거야.
통신업무는 지휘부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제일 먼저 들어가 제일 나중에 철수하지. 그리고 야전에서 벌어지는 임무다 보니 적에게 노출이 되기 쉬어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어.


전봇대에 올라가 전선을 잇다가 숨지기 경우도 많고 끈어진 선로를 연결하다가 지뢰에 당하는 경우도 부지기 수였지.

부령에서 선로를 연결하기 위해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고 나갔다 오니 긴급히 철수를 준비를 하라는 거야.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다면서.
청진항에서 LSD선을 탔는데 배는 일본으로 갈 것이고 그곳에서 다시 전선을 정비해 북진할 것이라는 얘기들이 돌았지.


그런데 막상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어.
부산에 도착하니 겨울인데도 날씨가 온화했지. 당시 방한복으로 나온 것은 솜을 두고 누빈 것이 고작이었어. 단추도 없어 앞 섶이 풀어헤쳐진. 제대로 씻지도 못했지. 누더기 차림으로 양쪽 어깨에 실탄을 두르고 허리춤에는 수류탄을 차고 있는 형색을 보니 시민들로서는 구경거리가 따로 없었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밀고 밀리는 교착상태가 계속됐지만 휴전이 임박해서는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중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어. 그것이 유명한 철의 삼각지이고 대머리 고지 등으로 불리는 곳이야.

24사단이 창설된다기에 자원을 했고 결국 55년 1월 60연대에서 전역을 했지.
훈장수여도 수도사단 18연대에서 2개, 24사단에서 2개를 받은 셈이지.
전장터에서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아. 오늘 죽을 지 내일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천운이 있어 여기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참으로 무수한 목숨들이 전장터에서 죽어갔지.
전쟁의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되겠지만 그래도 나라를 내손으로 지켰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지. 군인정신이라고 할까. 사회에 나와서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

고향에 돌아와 농사일에 매달렸지만 후회는 없어.용접기술자로 나섰다면 돈을 벌어 지금 보다는 노후가 넉넉했겠지. 하지만 내 복이 거기까지 인데 욕심을 부리면 안되지.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까 더 이상 여한도 없는 것 같아.

성장호씨가 정부로부터 국가유공자로 인정돼 받는 연금은 한달에 13만원이 전부다. 그것도 5만원부터 시작돼 많이 올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 씨는 대선후보마다 국가유공자를 예우한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막상 선거가 끝나면 성사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서운함을 내비쳤다.


특히 5녀1남의 자식들을 다 출가시키고 두 내외만 거주하는데 부인 이병숙씨(80)가 오래전부터 관절염을 심하게 않아 두달에 한번씩 서울 보훈병원으로 약을 타러 다닌다고도 했다.
내년부터는 군에서도 지원이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거실 한쪽 벽면을 가리고 있는 훈장과 각종 상장들이 노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과거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야기는 끝났다. 정오가 가까이 되면서 적당히 달궈진 대지에서는 누군가의 등에 업혔던 시절의 그리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명함 있으면 하나 놓고 가지. 가끔 삶엔 섬광 같은 순간이 깃들어 있다고들 하지만 이미 오래 산 채,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노인을 뒤로 하기가 헛기침 보다도 어려웠다.
가장 청결한 거즈로 그의 환부를 덮어 줄수만 있다면, 정말 그것으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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