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오피니언] 겨울에도 크는 호야
[당진신문 오피니언] 겨울에도 크는 호야
  • 당진신문
  • 승인 2019.08.10 06:00
  • 호수 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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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미(시인,수필가)

[당진신문=이종미]

호야를 처음 만난 곳은 옥상으로 나가는 계단 끝 부분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지 먼지를 한가득 뒤집어 쓴 책걸상이 어지럽게 나둥글었다. 짓궂은 학생들이 버린 쓰레기도 가득했다. 그곳에서 호야는 추운 겨울을 홀로 이기고 있었다.

탈진상태의 호야는 생명의 줄을 놓지 않고 희미한 빛을 의지하여 연두색 잎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화분은 나뭇결 문양으로 색상도 거무튀튀했다. 화분 안에는 호접란도 있었다. 생명줄을 놓은 지 한참 지났는가 보다. 몸통에서 바스락 소리까지 났다. 호야도 앙증맞은 잎사귀를 틔우지 못했더라면 아마 나의 시선에서 벗어나 호접란처럼 되었을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화분을 들어 올렸더니 공중으로 번쩍 솟구쳤다. 옆의 책상이 붙들어 주지 않았더라면 호야와 함께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 것이다. 흙으로 가득 차 있어야할 화분은 발포스타이렌수지가 대신하였고 그 위에는 눈속임처럼 잔 돌을 채웠다. 다행이도 호야는 흙이 조금 담긴 또 작은 플라스틱 화분에 담겨있었다.

십 년 전 호 씨 성을 가졌던 그 아이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이학년을 마무리 짓는 12월까지도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방과후를 이용하여 약 일주일만 데리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구구단이라는 태산에서 하산한다. 호 씨 성을 가진 이 아이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교사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학생들을 하교 지도 한 후가 더 바쁠 때가 있다. 협의회나 연수는 물론 학교경영 전달사항은 대부분 그 시간에 이루어진다. 하필 호○○에게 구구단을 지도 하려는 주는 유독 더 그랬다. 

협의회를 마치고 교실로 돌아오니 아이는 자진 귀가하고 없었다. 약 20분 정도 소요된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가버린 것이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아이는 내가 잠깐 교실을 비우면 그 틈을 이용하여 귀가해 버렸다. 그날도 내가 잠시 화장실을 가는 척 교실을 비우자 아이는 바깥 동정을 살폈다. 가방을 싸서 집에 갈 줄 알았던 아이는 의외로 내 책상으로 돌진했다. 순식간에 지갑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아이의 호주머니로 옮겼다. 그런 후 유유히 교문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평소 내 지갑에 얼마가 들었는지 잘 헤아리지 않는다. 대충 얼마 정도가 있는지 만 파악한다. 단순히 채워 넣기 위함이다. 그런 연유로 호○○가 언제부터 내 지갑에 손을 댔는지 감을 잡을 수도 없다. 이 아이를 어떻게 지도할까. 밤새워 머리를 굴렸다. 그런 후 지갑에 천 원짜리 한 장과 쪽지를 넣었다.

‘돈이 더 필요하면 선생님한테 말하세요.’
이렇게 순진한 아이가 또 있을까, 천원은 가져가고, 쪽지 말미에 “네”라고 써 놓고 가버렸다. 창밖을 보니 아이는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내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듯 그날따라 첫눈이 심난하게 흩날렸다.

다음날 아이는 스스로 남아서 슬금슬금 내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정말 돈을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많이 모아서 아빠한테 드려야 한단다. 그 뒤부터는 입을 닫아버려 이유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뜬구름 같은 아이의 말을 어떻게 해석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집까지 따라갔다.

집은 학교에서 꽤 멀었다. ‘조금만 더’ 라는 말을 믿고 걷다보니 30분을 훌쩍 지나서야 도착했다. 함석으로 두른 집은 내 한숨에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인기척에 문을 연 할머니는 실눈을 뜨고 있었다. 눈병을 방치하여 그리됐다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엄마는 이미 세상을 버렸고, 아빠는 새엄마랑 경기도에 사는데 가끔 집에 들른단다. 할머니와도 별다른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다. 아마도 제 딴에는 아빠가 돈을 많이 모아야 함께 살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리한 것이리라.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없었다. 쌀 한 자루 던져주고 부담으로 엉켜있던 실타래를 끊어 버렸다. 천만다행이도 아이는 삼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 봄방학 때 아빠가 있는 경기도로 전학을 갔다. 고맙게도 호○○는 내 양심의 돌을 알뜰하게 치워놓고 떠나갔다.

그 추운 창고에 호야를 두고 간 사람은 기억이라도 날까. 저절로 호야가 떠올려지면 걱정과 자책으로 뒤엉킨 마음을 지우려 얼굴 찡그리며 잊으려 애쓰지나 않을까. 혹시 그가 호야를 찾으러 올지 모를 일이다. 그래 옥상 출입구에 쪽지라도 붙여놓아야 겠다.  

‘호야는 새엄마를 만나서 사랑 엄청 받으면서 잘 크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