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호 칼럼■






 

논설고문

 가을이다.
 가을이 오는 길에서 우리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가을의 문턱에 맨 먼저 나서서 함께 가을을 몰아오는 이, 코스모스다.
 코스모스는 가을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여름이 시작되면 벌써 듬성듬성 피는 걸 보게 되면서 계절을 잊은 놈인가 했었다. 아니면 계절을 아랑곳하지 않는 놈이거나 정신을 놓아버린 놈일 수도 있겠다고 여겼지만 그게 다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이었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원산지가 멕시코인 코스모스는 6~10월에 꽃이 피는 국화과의 한 해 살이 풀이었다. 워낙 가을 색채가 짙은 꽃이라서 그리만 생각하느라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 뿐 지극히 정상적인 자연의 현상이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누가 뭐라고 해도 코스모스는 분명 가을꽃이다.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어야 제격이라는 말이다.
 가을이 채비를 하면 한 발 먼저 앞장 서는 게 코스모스다.
 가을 들판에 지천으로 피어 무리를 지어 선 코스모스를 보라. 그들의 얼굴을 보라. 소녀의 얼굴 아닌가. 여인네가 되려면 아직은 먼 그 소녀의 함초롬한 눈동자로부터 무슨 속삭임이 들리지 않는가. 수많은 소녀들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오는 시의 낭송(朗誦)이 들려오지 않는가. 저마다의 시를 읊는 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그들의 태를 보라. 초라니처럼 촐랑대지 않는다. 양반네 뒷짐 지고서 배 내밀고 허리 젖히는 거드름도 아니다. 김수영의 시 “풀”에서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의 모양새도 아니다.
 단발머리 소녀가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어 올려 수줍게 젖히는 모습, 흔들던 바람이 무색하리만치 보일 듯 말 듯 하는 미세한 몸짓 바로 그 품새가 아닌가.
 곳곳에서 코스모스 축제가 한창이다. 경기도 구리시의 ‘구리코스모스 축제’, 경남 하동군의 ‘북천 코스모스 메밀 축제’, 전남 곡성군의 ‘석곡 코스모스 음악회’ 등이 9월 중순이면 일제히 축제의 한 마당을 펼친다. 축제가 한창 무르익어 사람과 코스모스가 뒤섞여 함께 어우러지노라면 그 숫자도 비슷해져서 어느 쪽이 감상을 하는 쪽인지 구분도 없어진다. 사람이 코스모스를 감상하는 것인지, 코스모스가 사람을 감상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를 않는 것이다. 사람 꽃이 더 활짝 피었으니 감상을 당할 수도 있겠다.
 오래 전 우리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 꽃길 가꾸기가 있었다. 돌담길을 따라, 농로를 따라 꽃길을 만들고 가꾸는 일이었다. 그때 만드는 꽃길은 거의가 코스모스 꽃길이었다. 들판 한가운데로 농로를 따라 나서면 어김없이 코스모스의 무리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우리는 마음먹는 대로 언제든지 그렇게 쉽게 소녀들을 만나고는 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소녀들, 아리따운 소녀들을.
 코스모스의 꽃말은 ‘소녀의 순정’이라고 한다. 그렇다. 소녀면 당연히 순정일 터이다. 수려하지만 청초한 소녀의 순정으로서. 정열의 불씨는 아직 틔우지 않고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는, 가슴도 미쳐 다 부풀지 못하고 있는 소녀에게서 농염을 찾을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먼 미래가 오기까지 아직은.
 소녀에게는 미완의 이미지가 있다.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소녀이다. 그래서 소녀는 언젠가는 떠난다. 소녀가 언제까지고 소녀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라서, 더 이상 소녀일 수가 없어서 떠나고, 순정이 변하여 떠나고, 순정을 간직할 수 없어서 떠난다. 세월이 떠나보내기도 하고, 스스로 떠나기도 한다. 마음속에 간직한 정열의 불씨에 불이 지펴지면, 가슴이 다 부풀어 터지면 떠나가게 된다.
 소녀가 떠난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그림자가 남는가. 그림자도 없고 흔적도 없다. 맡아질듯 말듯 한 향기만 남는다. 생각이 날듯 말듯 한 아련한 기억만 남아서 맴돈다. 가을에 온 소녀는 또 가을과 함께 그렇게 가버리는 것이다.
 서정주가 읊은 시 “국화 옆에서”의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 국화라면,
 코스모스는 ‘휘감기는 단발머리, 여리게 드리우고 떠나는, 뒤태를 따라가며 나부끼는, 소녀의 치맛자락에 매달린, 해맑은 미소’ 같은 꽃으로 그려볼 수 있겠다.
 그리움으로만 남는,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래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님과 같은 그런 꽃이다.
 이제 곧 가을걷이가 끝나면 들판엔 남겨진 자의 쓸쓸한 기운만이 거친 들판을 맴돌게 될 것이다. 머지않아 거기에 찬 서리가 뿌옇게 내리는 날 마음도 함께 불투명 유리로 닫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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