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김문헌 숭실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당진신문=김문헌 교수]

일본(日本). 가깝고도 먼 나라다. 이 말은 지리적으로 가깝지만, 심리적 거리는 멀다는 뜻이겠다. 지금 일본의 경제적 무역 보복이 갖는 의미가 더욱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을 단순히 국가주의적 시각이나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현재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것은 자못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세계 전체가 자본주의가 확장되는 시기로서 매우 혼란스러운 역사적 상황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연히 중국과 일본은 그 열강들의 압력에 굴종적으로 때에 따라서는 순응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그 분위기를 받아들였다.

그 틈새에서 한반도가 처한 현실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거의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는 정치가 대세였고, 그에 대한 결과는 매우 굴욕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든 아시아공동체의 국제정세는 열강들의 자본수출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것처럼 인식되었다. 이러한 화근으로 인한 일본제국주의의 위기가 한국과 중국의 식민지 약탈을 야기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추상으로서의 국가나 허구의 민족을 넘어서 구체적 존재인 민중을 위한 삶의 관심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세계자본주의의 부속물로써 상품을 팔아야 하고 착취를 해야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 완강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의 일본의 무역 보복에 대한 국내외 불매운동이 또 하나의 저항으로 비춰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거 민중의 시공간을 억압하고 점유하고 착취하면서 나눔과 분할, 분배에 대한 정치와 정책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의 현실도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불매운동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민중의 보편적 이성의 판단능력을 강화해야 한다. 세계자본주의가 경제적 투자와 함께 경제적 투자를 함께 진행하는 힘에 대해서 맹목적·감정적인 대처로는 국제질서를 바꾸거나 자본주의의 뿌리 깊은 문제를 변혁시켜나가기에는 역부족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자크 랑시에르(J. Ranciere)의 말을 들어보자.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필연성, 가능성, 불가능성이 벌이는 게임의 재배치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대서사의 종언이 곳곳에서 떠들썩하게 선고되던 동안, 자본주의와 국가의 지배는 역사적 필연성의 원리를 그저 [간단히] 인수했다. 필연성 및 필연성의 지식에 대한 복종이 그 어느 때보다 가능태의 유일한 방식으로써, 행복의 방식으로써 긍정되었다... 역사적 필연성은 ‘전지구화’(globalization)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자본주의에 의해서 국가라는 추상의 틀 속에 존재하는 민중의 시간과 공간은 화폐에 의해서 불평등하게 재편성되었다. 민중들조차도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잉된 화폐가치에 대한 신뢰와 욕망이 민중과 민중 사이의 심연을 크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자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계급의 전복적 시도와 전쟁으로까지 확산되었다. 민중의 시공간은 국가라는 허울을 넘나드는 자본에 의해서 빼앗기고 정치는 자본의 시녀로 전락을 하였다. 그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전세계의 민중의 삶은 여전히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허상인 국가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서 공통의 삶이 휘둘리고 있다. 또한 자크 라캉(J. Lacan)이 주장한 대타자(Autre)인 국가, 법, 종교, 돈의 시니피앙이 발언하는 명령에 주체적인 이성적 판단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무역이나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스포츠와 문화 일반에 대해서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대타자의 명령에 의해서 무의식이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중이 경험한 뼛속 깊은 트라우마(trauma)도 무시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단순히 일본제품의 불매운동으로서의 저항으로만 그친다면 안 된다고 본다. 감정적, 민족적 대처 방법보다 좀 더 근원적인 분석과 삶의 변화가 필요하다. 랑시에르는 그것을 “혁명적인 날”이라고 못 박는다. 적어도 민중은 과거 자본에 의해서 편성된 아시아 속의 한반도의 시공간을 재편성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자본은 국가, 국경, 인종, 이념, 인권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 오직 돈이 되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점유하고 점령하여서 민중의 모든 이성과 감정을 장악한다.

정치가는 단지 그 화폐권력의 대리적 표상일 뿐이다. 화폐의 시종이자 그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꼭두각시들이다. 자본가는 역사적 공통의 시간과 공간을 지배함으로써 민중이 참여하고 가져야 할 몫(part-cipation)의 시공간을 찬탈한다. 그에 따라서 공통의 역사적 시공간의 서사는 무너지고 자본가의 시공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랑시에르에 기대어 생각해보자. “내가 고민하는 문제는, 단지 오늘날 전지구적 시간의 역사적 흐름, 지배 형태, 우리 삶의 시간이 맺는 관계를 사고하는 데 쓰이는 지배 모델을 재검토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이제 민중은 랑시에르의 말대로 무능력을 생산해서는 안 된다. 불매운동을 통한 저항은 지속성을 띠면 좋겠지만, 과거와 현재의 자본에 의한 시계의 계측적 시간, 실증적 시간을 중단하고 민중의 공통의 시공간을 조직하는 일이 시급하다. 민족과 국가에 대한 사유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자본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허상과 허울의 추상을 지배하는 게 무엇인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서사형식과 시간의 가능성,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다른 삶의 사유 가능성을 꿈꾸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나가도록 해야만 한다. 그것이 국가나 민족을 넘어서 함께 고통을 받는 세계민중들과 연대하는 삶이 될 것이다. 민중들은 이번 기회에 자본가와 정치가가 민중 자신의 나눔(분할과 공유)의 삶과 시공간을 상업공간으로 전환하려는 것에 더욱 저항해야 한다. 그래서 민중의 삶의 장소는 민중과 민중이 자신들의 절대자유를 위한 공통의 시공간의 나눔(분할과 공유)이 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민중의 자유를 위한 마음은 일본과 같은 포스트콜로니얼(postcolonial)의 국가적 지리보다 더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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