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당진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
[인터뷰] “당진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싶었다”
  • 최효진 기자
  • 승인 2019.06.29 06:00
  • 호수 126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년 4개월 동안 당진신문에 역사산책 연재한 김학로 소장
“연구소 차원에서 민주주의 확립의 근대사 정리해 나갈 것”

[당진신문=최효진 기자] 역사산책’은 3·1혁명 100주년을 1년 앞 둔 지난 2018년 2월 마지막 주 처음으로 당진신문 독자들을 만났다. 그 이후 김학로 소장은 무려 1년 4개월을 매주 빠짐없이 연재를 계속했다. 그의 노고 덕에 독자들은 당진의 항일독립운동과 연관된 인물들을 보다 생생하게 만날 수 있었다. 지난 1258호(6월 10일 발행)로 기고를 마무리한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을 만났다.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지역의 3.1독립만세운동 관련 인물들을 정리해 왔다. 1년 동안 부담이었을 것 같다

돌이켜 보니 꼬박 1년 4개월을 매주 연재했다. 매주 글을 써 지역의 역사를 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일이긴 했다. 알려지지 않았던 일을 알아내기 위해 기록을 찾고, 후손을 수소문해 만나거나 증언할 만한 지역 주민들을 찾았다. 그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반면 독립운동가의 활동 모두를 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측면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죄송스럽기도 하다.

●연재를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3.1혁명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이고, 오늘날 3.1정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 차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3.1혁명의 역사적 의미를 지역 주민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을까? 그런 고민 끝에 우리 지역에서 일어났던 3.1혁명과 여기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에 주목하고 인물 열전을 연재해 보고자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3.1혁명은 거창하고 위대한 위인들이 혁명을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만 발표하고 자발적으로 일제 경찰에 잡혀갔다. 나머지는 우리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남녀노소들이 모여 정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한 평화적인 차원의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당진에서 벌어진 사건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알리고 싶었다. 

●독자 입장에서는 지역의 인물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나름 반향이 있었다. 충남 보훈처에서는 전화를 걸어 올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받은 독자반응은 없었나?

예상하지 못할 만큼 많은 분들이 당진신문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지역신문인 당진신문이 이렇게 널리 읽히는지는 미처 몰랐는데 뜻밖에 많은 분들에게서까지 인사를 받아서 놀랐다.

 그리고 지역에서 안면이 있는 분들뿐만 아니라 기고에서 나온 인물들의 후손들을 만난 경우도 있었다. 자신들도 정확히 모르던 조상의 삶을 신문 지상에서 보게 되어 고맙다는 경우다. 면천의 고희준 선생 후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소개해 준 인물 중 훌륭한 분들이 많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인물이나 좀 더 주목을 받았으면 하는 인물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박창신 선생을 주목했다. 합덕 신석리 상흑 출신으로 면천 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다녔다. 원용은 선생 등과 함께 면천학생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장본인이다. 박 선생의 경우는 3.1혁명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하였다. 그래서 주목해 볼 만한 분이다.

우리 독립운동사를 보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1900년 전후에 태어난 인물이 유독 많다. 김원봉, 윤세주, 박헌영, 심훈 등이 모두 그 세대였다. 이 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것은 20대 전후의 젊은 시절에 3·1혁명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독립운동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들 중 25세 미만의 20대가 30% 가까이 된다. 피 끓는 청춘의 젊은이들이 3.1혁명에 직접 참여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에 맛보았던 3.1혁명은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 세대에 의해 독립운동이 이루어졌고 그 분들의 피와 땀으로 결국 해방을 맞았으니 우리는 그 분들에게 큰 빚을 진 것과 같다.

일반적인 경우로 봐도 박 선생은 지역의 대표적인 사례로 생각한다. 당시 3.1혁명에 참여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처벌받고 나서 은둔하거나 평범한 삶을 살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박창신 선생만큼은 그 이후에도 어떤 형태로라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합덕에 근거해서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다. 여러 차례 구속되어 징역살이도 하면서 소작쟁의 운동, 청년운동 등을 계속했다. 그런 분이 서훈은 고사하고 애석하게도 한국전쟁 당시 피살이 된 것이 안타까울뿐이다.

●3.1혁명 100주년을 보내고 있다. 100년 전의 사건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간단하게 말하면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역사에서 미친 영향이 매우 컸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공화국이 3.1혁명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정신은 정의, 인도, 동포애다. 헌법전문에는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 인도, 동포애라는 헌법정신이 바로 3.1혁명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헌법정신이나 3.1정신에 대해 배우고 익혀 본 적이 없다. 애써 3.1정신을 외면하고 싶어 하는 세력이 우리 사회의 주류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또 하나는 민주공화국, 공화주의 정신이란 것이 대단히 위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 역사에서 민주공화국을 온 국민이 합의하여 정체로 정한 것은 대한민국뿐이고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3.1혁명 때문이다.

3.1혁명의 정신과 가치는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주독립, 민족통일, 평등과 민주주의 실현 모두 3.1혁명의 정신과 가치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의 지속가능성이 3.1혁명 정신이라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면이 3.1혁명 정신이고 역사적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당진에서 기념할만한 의미있는 사업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당진 독립운동 기념관을 3.1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세워 보는 것이다. 왜냐면 3.1혁명은 그 자체로도 위대한 사건이었지만 3.1혁명 100주년이란 사건을 어떻게 맞느냐 하는 문제도 의미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3.1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공유하고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그런 것이고, 우리 당진 사람들은 3.1혁명 100주년을 이렇게 맞이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그래야 3.1혁명 200주년이 더욱 빛나지 않겠나 싶다.

●앞으로의 활동을 계획을 부탁드린다

당진신문에 기고한 글을 100주년 기념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지역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연구소 차원에서는 자주독립과 민족통일 민주주의 확립의 근대사를 정리해 나가기로 하고 연구를 진행 중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동학농민혁명부터 여기까지 왔다. 이후 계속해서 최근 민주화 운동까지 정리할 계획이다. 당장은 국사편찬위원회와 당진 지역 근현대사 사료를 수집정리 중이다. 우선 1980년대 이전 사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일이다. 이후에는 순차적으로 현대 민주화 운동까지 정리할 계획이다. 당진이 민주주의 확대와 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과정을 정리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