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지금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60년 4월 19일 혁명이 발생했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학생운동으로 시작한 혁명은 마침내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병으로 사망한 후 이승만대통령은 사실상 단독 대통령후보로 당선이 확실하였으나 자유당의 부통령후보인 이기붕은 민주당의 후보인 장면에 뒤졌다. 이를 불안하게 생각한 이기붕의 추종세력은 전국의 시장 군수와 경찰 간부를 불러 부정선거를 획책하였다. 선거유세기간 내내 고교생들의 학원자유화와 공명선거를 위한 시위가 계속 되었다. 3월15일 선거가 실시되었으나 투개표에서 부정을 저지른 이기붕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날 마산에서는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 항쟁이 이어졌고 이를 저지하려는 경찰의 발포로 인해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18일 마산시민항쟁의 발포에 대한 책임으로 부정선거를 주도한 최인규 내무장관이 사퇴하였다. 4월11일에는 마산시민항쟁 때 행방이 묘연했던 고교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 위로 떠올랐다. 경찰이 쏜 최루탄이 눈에서 뒷머리까지 박혀 있었다. 국민들은 경악했고 정권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김주열의 죽음을 시발점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4월18일에는 고려대의 학생들이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다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깡패들의 기습으로 수십명이 부상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마침내 4월 19일 광화문 일대에는 10만이 넘는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고 일부 시위대가 저지선을 뚫자 경찰이 다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사상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이후 계엄 선포와 함께 계엄군이 진입하였고 이어 이기붕부통령이 사퇴하여 시위가 잦는 듯 했으나 259명의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에 나서자 수많은 시민들이 합류,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였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와 함께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으며 이기붕일가는 아들 이강석의 총탄에 모두 죽었다.
부정선거 규탄으로 시작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의 퇴진을 이끈 4.19혁명은 김주열 열사를 포함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의 피로 이루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다시는 굴곡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숙연히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혁명 50주년을 맞는 오늘 바다에서는 김주열열사와 함께 천안함과 그 영웅들이 온 국민의 오열 속에 떠오르고 있다. 한시도 놓아서는 안 될 혁명정신과 안보의식이 바다위에서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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