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와 정미면은 3.1혁명 당시 독립만세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지역이다. 보통 대호지와 정미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라고 하면 1919년 4월4일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만을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은 대호지와 정미면에서는 더 많은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된 바 있다. 이렇게 대호지와 정미면에서 일어났던 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연장선에서 진행된 독립만세운동으로 이해할 만하고, 2차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호지면 송전리 전경.
대호지면 송전리 전경.

당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대호지와 정미면 일대는 일제의 검거 열풍으로 쑥대밭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런데도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에 대호지와 정미면에서 일제히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대호지와 정미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연속해서 전개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천도교의 조직력과 준비정도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주요 세력과 인사들은 이미 검거되거나 검거를 피해 달아난 상태였다. 따라서 제2의 독립만세운동을 다시 일으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천도교 조직만은 독자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했을 만큼 조직적이었고,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백남덕·백남주 형제가 있었다.  

백남덕은 1871년 생으로 3.1혁명 당시 49세의 중년이었다. 천도교인이었던 백남덕은 대호지면 송전리 출신이다. 송전리는 천도교인이 많았는데 이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쫓겨난 동학도인들이 송전리로 숨어들어 살았기 때문이다. 백남덕이 언제부터 천도교에 입문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1916년에 서산 전교사로 임명을 받고 활동했던 것으로 보아 3.1혁명 당시에는 대호지면을 대표할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고 볼만하다.

주지하듯이 3.1혁명은 준비과정에서부터 천도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 천도교에서는 손병희의 주도하에 1919년 1,2월경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3.1혁명을 준비하였다. 이때 당진지역 천도교인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기미년 독립운동금지불인 명단」에는 백남덕을 포함한 92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당진지역 천도교인들의 독립자금 모금 현황을 기록한 「기미년 독립운동금지불인 명단」에 서산 대호지의 백남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역을 초월한 동학의 연원제에 기인한 것으로 보면 간단한 문제이다. 즉 백남덕은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였는데 자신이 속한 동학 조직의 연원이 당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1919년 당시에도 천도교에는 여전히 동학의 연원관계에 따른 조직체계가 유지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백남덕이 당진 천도교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1924년 4월30일 천도교 당진교구 설립 과정을 기록한 『당진천도교회사』에 백남덕이 등장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천도교는 전국의 천도교 조직을 통해 3.1혁명을 거국적으로 전개하도록 독려하였다. 따라서 천도교 당진교구에서도 천도교의 방침에 따라 독립자금을 모으고, 당진읍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백남덕 역시 연원관계에 따라 당진 천도교 조직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관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백남덕은 동생 백남주, 생질 홍순덕 및 김장안 등과 협의하고 남기원, 최정천, 이동하, 이달준, 민재봉, 남상락 등 대호지면의 천도교인들에게 연락하는 등 독자적인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천도교인이자 면서기인 민재봉을 통해 대호지면에서 면장 등이 연결된 독립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계획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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