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없지만 몸은 있으니까...도움주는데 몸이라도 쓰는거지”
“나 먹는 것보다 나눠주는게 좋아. 이제는 이게 내 봉사여”

[당진신문=배길령 기자] 우리는 참 표현에 서투르다. 남을 칭찬하는 일에 인색하고 타이밍을 놓쳐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입 간지러워 참을 수 없는 착한 당진 사람들의 선행이 보인다. 내 고장 당진에 살고 있는 좋은 분들을 알게 된 이상 지나칠 수 없다. 이에 본지는 입 간지러워 참을 수 없는 착한 당진 사람들의 선행을 칭찬해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나하고 딸, 아들 이렇게 셋이었는데... 이렇게 가족이 많아져서 기분이 참 괜찮아”
손주들과 함께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남편을 만나러 가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장정안(90) 어르신은 지나온 세월을 되짚었다. 

“우리 아들이 3살 먹었을 적인가봐. 딸은 이제 막 갓난쟁이고. 애 아버지가 군대를 갔어. 전쟁 막바지였다는데 곧 있음 제대할 무렵인데 군에서 남편이 도망갔다고 집을 찾아왔어. 집에 오지를 않았는데 무슨 소리냐고 했더니, 얼마간 찾아본다고 하고 돌아갔는데 남편이 전사했다고 연락이 왔어”

합덕에서 공무원으로 재직했다는 남편은 주말이면 집으로 왔다. 중매로 남편을 만나 채 2년도 살지 못한 장정안 어르신은 남편의 전사소식에 두 아이를 잘 키워내겠다는 생각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고물장사도 하고, 투가리(뚝배기)장사도 하고, 새우, 실치도 팔고, 논일 밭일 안 해본 게 없어. 마을사람들이 일손 필요하다고 하면 가서 일도와주고 품삯 받고, 사탕공장 사탕도 팔고, 딸을 등에 업고 다니면서 대덕산가서 나무심고... 친정에서 보내준 닭 한 마리가 낳는 알이 그렇게 귀해서 먹어보지도 못하고 계란을 엮어다가 팔고 그랬지. 한 푼이라고 더 벌려고...”

일이 있을 때는 봉사활동을 가지는 못해도 일이 없는 날이면 꼭 봉사활동에 참여했다는 장정안 어르신은 옛 동네인 시곡리 주민의 기억 속에도 늘 봉사에 앞장서는 분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일찍부터 나와 계성초로 가는 나무다리에 비를 들고 서서 아이들 건너가는데 다치지 말라고 눈을 쓸던 모습을 주민들은 기억했다. 또 비가 많이 내려 냇가가 불어 건너지 못하는 아이를 발견하면 냇가를 가로질러 건너편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단다. 김찬기 시곡1통 통장의 기억이다.

본인의 이야기에 끔뻑끔뻑 듣기만 하시던 어르신은 “나는 기억이 없는데... 그랬나? 나이가 계속 드니까 바로 전 것도 깜빡해. 그랬다고 하니까 그랬나보다 하지요 뭐”하고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배운 것도 없이 부녀회장을 맡아 12년을 했다는 장정안 어르신은 봉사활동을 다니며 알게 된 합덕의 한 가정에 매달 2만원씩 2년간 부쳐주기도 했다.

“봉사활동을 다니다 보니 그 집이 그렇게 어렵다고 했어. 남편이 그렇게 되고 1년에 2번씩 연금이 나오니까 모아다가 자식들 학비에 쓰고 매달 2만원씩은 그 집에 부쳐주고 그랬지. 살아계실 적에는 몇 번 들여다보기도 했어”

5,60대가 되어 이곳 읍내동으로 이사 와서는 여성단체와 미망인회 회원들과 바자회로 기금을 마련하거나 헌옷을 팔기도 하고 비누를 만들어 판매수익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봉사활동을 다니게 된 이유에 대해 장정안 어르신은 별것 아니라고 말했다.

“돈은 없지만 몸은 있으니까. 또 우리는 미망인이라고 나라에서 도움을 받는데 우리만 받을 수가 없으니까. 먹고살기 힘든 게 무엇인지 아니까 몸이라도 쓰는거지”

허리가 굽은 80세 이후로는 몸도 안 따라줘서 단체봉사활동에 나서기도 어렵다는 장정안 어르신의 요즘은 아들, 며느리가 해주는 밥 먹고 경로당 놀러가는 게 다라며 편하기만 하다.

이곳 경로당을 다니자 장정안 어르신에게 ‘떡 할머니’라는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경로당을 방문할 때마다 무엇인가를 꼭 들고 온다며 경로당 할머니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떡 할머니라고 부르더라구. 여기저기서 떡을 주면 항상 가지고 경로당으로 가서 할머니들이랑 나눠먹고 하지. 나 먹는 것보다 사람들 나눠주는 게 좋아. 이제는 이게 그냥 내 봉사여. 여러 할머니들이랑 간식 나눠먹는 거”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