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남상락은 대호지면 도이리 출신으로 1892년생이다. 대호지면 도이리는 의령남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남상락 역시 의령남씨였다. 도이리 의령남씨들은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종숙을 운영하였는데 후일 타성도 받아들여 사숙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남상락은 사숙인 도호의숙에서 성리학에 기반한 한학을 배웠다. 성장한 이후에는 대호지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그리고 대호지면에 널리 퍼져있던 천도교에 입도하여 천도교인으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남상락이 성리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천도교적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천도교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의미한다.

1919년 4월4일 대호지면민이 일치단결하여 전개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남상락을 비롯한 몇 명의 대호지면민이 고종의 인산을 보기 위해 경성을 방문하면서 비롯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고종이었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조선 민중을 애통하게 하였다. 더욱이 그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인산을 보기 위한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번져 많은 사람들이 경성으로 모여들었고, 그 중에는 남상락도 있었다. 이렇게 28살의 청년시절에 경험한 3.1혁명은 남상락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남상락 일행이 경성에 도착한 것은 인산일인 3월3일보다 빠른 1919년 3월1일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침 경성 일대에서 전개된 3.1혁명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독립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목격한 남상락은 크게 감동받았다. 그리고 독립만세운동에 함께하였고, 어렵게 구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대호지로 가져왔다. 하지만 남상락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대호지까지 가져온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제가 3.1혁명이 전국으로 전파될까 두려워 철저히 단속하였기 때문에 숨겨오지 않으면 가져 올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남상락은 백화점에서 대통으로 길게 만든 램프를 샀다. 긴 대통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말아 넣으면 일제 경찰의 검문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남상락 일행은 일제 경찰의 검문을 피해 경성을 빠져나와 인천에서 배를 타고 대호지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렇게 가져온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의 뜻을 전하는데 충분히 활용 할 수 있었다.

대호지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준비되면서 남상락은 특별한 일을 준비하였다. 그것은 태극기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경성에서 본대로 대호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제대로 하려면 태극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남상락은 경성 백화점에서 사온 대통램프를 이용하여 한 밤에 마을 부인들을 모아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남상락이 제작한 태극기는 단순한 태극기가 아니라 정성스럽게 수를 놓아 만든 태극기였다. 이렇게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서 쓰인 남상락의 대통램프와 자수 태극기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끝나자 일제는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음날 대호지면에 군경을 출동시켜 대호지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남상락도 1919년 4월5일 체포되었다. 중요한 것은 남상락만이 체포된 것이 아니라 남상락의 형인 남상돈과 동생인 남상찬 등 삼형제가 함께 체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남상락 삼형제의 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빛나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일제에 체포된 남상락은 공주형무소로 수감되었다. 남상락이 체포된 이유는 보안법 및 소요죄였다. 남상락은 공주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1919년 10월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한 남상락은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여 법정투쟁을 이어갔다. 결과는 1919년 12월24일 징역8개월로의 감형이었다.

저작권자 © 당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