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역사산책]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송재만Ⅲ
[당진신문 역사산책]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송재만Ⅲ
  •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9.04.13 08:30
  • 호수 1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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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기록된 송재만 선생.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기록된 송재만 선생. 출처=국사편찬위원회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천의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당진경찰서에서 출동한 이궁(二宮)과 고도(高島) 순사가 무리하게 태극기를 빼앗으려다 총을 발사하면서 시위의 양상은 급격하게 변하였다. 결렬한 투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평화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돌아가려는 시위대를 향해 일제 순사가 권총을 발사하여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니 시위 군중이 순사들을 붙잡아 폭행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송재만은 앞장서서 ‘저놈들은 총을 쏜 자이니 때려 죽이자!’고 소리쳐 순사들을 향해 돌을 던졌고, 붙잡힌 상원상정(上原尙定) 순사와 순사보 이재영, 유기우를 솔선하여 구타하였다. 이로 인해 상원 순사는 질병휴업 2주의 부상을 입었고, 유기우 순사보는 질병휴업 1주의 부상을 입었다. 또한 일제 순사들이 도주하여 천의주재소로 달아나자 행동대원을 이끌고 천의주재소를 공격하여 크게 파손시켰다.

이렇게 시위가 격화되자 천의에 거주하던 일본인 전고족수(田尻足穗)가 말리려고 나섰다. 하지만 성난 군중은 일본인인 전고에게도 폭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전고가 쫓겨 집으로 도망치자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송재만은 행동대원을 이끌고 전고의 집으로 쫓아가 전고를 구타하였다. 그리고 전고의 집을 포위하고 집에 있는 엽총을 빼앗았고, 전고의 아내에게 권총을 가져 오라고 하여 권총 1정과 약간의 실탄을 빼앗아 소지하였다. 그리고 엽총 1정은 이대하가 소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빼앗은 무기는 김동운이 가지고 있던 상원 순사의 검과 함께 대호지로 돌아오는 길에 장정리에서 이인정이 명하여 대호지면 적서리 덤불 속에 숨겨두었다. 이렇듯 천의장터에서의 격렬한 시위는 행동총책임자 송재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일제는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 관련자를 체포하여 공주형무소에 수감하였다. 송재만 역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마친 후 일제에 체포되었다. 공주형무소에서 송재만은 모진 고문에 시달렸다. 하지만 송재만은 일제에 굴하지 않고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거사계획부터 당일 시위의 주동에까지 나의 단독행위이다. 다른 사람은 죄가 없다. 죄없는 무고한 양민을 속히 석방해라 그리고 나 또한 내 조국, 내 강토, 내 나라를 내가 찾겠다는데 그것도 죄란 말이냐? 너희는 너희 나라가 남에게 뺏겨도 그대로 보고만 있겠느냐?’ 라는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일제는 송재만의 기개에 놀랐던지 송재만에게 가장 큰 죄목을 적용하였다. 송재만에게 적용한 혐의는 치안방해죄, 공문서 위조 및 동 행사죄, 출판법 위반, 가택침입죄, 강도죄 등이었다. 철저하게 파렴치한 범죄자로 몰았던 것이다. 그 결과 송재만은 1919년 10월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 관련자 중 가장 큰 형량인 징역 9년의 실형을 받았다. 일제가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서 송재만에게 가장 큰 죄를 씌웠던 것은 송재만의 역할에 주목하였던 측면도 있었지만 3.1혁명을 폄훼하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3.1혁명이 전 민중적으로 전개되자 당황한 일제는 조선 민중의 정당한 독립의 요구를 인정할 수 없었다. 따라서 3.1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작고 단순한 폭력을 부각시켜 3.1혁명 전체를 파렴치한 폭력적 사태로 몰아가고자 하였다. 대호지·천의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세서도 폭력 사태에 주목하여 송재만에게 모든 책임을 물었던 결과였다.

송재만은 법정투쟁을 통해 징역 5년 형으로 감형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만기 출소한 송재만은 사성리로 이사하여 살았다. 사성리로 이사한 것은 일본인들을 보고 살기 싫었는데 조금리에는 일본인들이 살았던 때문이고, 사성리에는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지사들이 많았던 까닭이었다. 송재만은 사성리로 이사한 후 결혼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내내 요시찰 인물로 감시받고 살았던 송재만은 1951년 3월3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송재만의 무덤은 대호지면 사성리 발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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