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는 주말마다 대전에 다녀왔다. 내비게이션은 면천 IC를 경유하도록 안내했다. 세 번째쯤 되던 날인가, 당진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세요. 진달래의 도시, 당진입니다.’ 어딜 가나 흔하다지만 애써 찾아보기 힘든 당진의 시화, 면천 IC를 오가는 길목에라도 흐드러져 피어있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지난해 당진시 면천면에 피었던 벚꽃
지난해 당진시 면천면에 피었던 벚꽃

진달래 한 번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봄은 턱밑까지 와 있다. SNS 담벼락에는 여기저기 벚꽃 축제 소식이 경쟁하듯 올라온다. 충청남도 페북지기가 소개하는 벚꽃 명소들 가운데 당진 순성 벚꽃길도 있어 반가웠다. 수많은 ‘좋아요’와 댓글이 달렸고 개별 페이지에서는 순성이 특히 인기가 좋았다. 나는 지난해에서야 처음으로 이 꽃길을 걸어보았다. 당진천의 발원지를 찾아 가보자고 이끌어준 사람들 덕분이다. 그들과 걸었던 그 길은 단순한 꽃길 이상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사랑에 빠질 만큼 아름다웠던 벚꽃도 함께.   

사실 나에게 벚꽃은 아름다운 봄꽃이기 전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꽃이었다.  실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군대 휘장에 벚꽃을 쓰기 시작했다. 군국의 꽃은 우리나라에도 뿌려졌다. 1900년대 일제의 통치 아래 놓여있던 우리나라의 상황을 굳이 복기하지 않더라도 한반도를 영원히 지배하고자 했던 그들의 야욕은 살 떨리게 치밀했다. 사쿠라 꽃잎처럼 천황을 위해 죽으라는 문구가 떠오르지 않더라도, 야스쿠니 신사가 온통 벚꽃으로 뒤덮여 있는 걸 알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일본의 식민지 영토임을 상징하기 위해, 조선의 민족성을 없애기 위해 일부러 심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난 2012년, 일본의 정치인들은 미국 뉴저지주 팰리세이즈파크시에 세워진 위안부 추모비 철거를 요구하면서 그 대가로 거액의 투자와 함께 천여그루의 벚나무 지원을 내걸었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그들에게 벚꽃의 의미는 전과 다를 바 없다. 

일제 패망이후 벚나무는 잠시 수난을 당한 때도 있다. 진해에서만 10만 그루에 달하는 벚나무가 베어졌다고 할 정도다. 그랬던 것이 1960년대 들어 부활한다. 뽑혀나간 자리에는 일본의 기업인, 언론인 등이 기증해온 벚나무가 다시 심어졌다. 벚꽃을 심으라고 직접 지시를 할 정도로 벚꽃을 좋아했다는 당시 집권자. 그의 해방 전 이력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지난 해 디베이트 대회를 준비하며 아이들과 창경궁에 다녀온 적이 있다. 창경궁은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곳이기도 하다. 과거 창경궁의 비극은 화려한 벚꽃놀이에 가려져 있었다. 일제는 1908년 봄부터 창경궁의 존엄성을 훼손시키기 시작했다. 전각 바로 옆에 일본식 건물을 짓는가 하면 남쪽 보루각 일대에는 동물원을 세웠다. 60여 채 전각과 담장이 철거 되거나 변형됐고 기단, 초석까지 파내버렸다. 1909년 순종이 참석한 가운데 동·식물원 개장식이 열렸고, 이후 창경궁에서 창경원으로 이름마저 격하시켜 버렸다. 뜰에는 벚나무 수천그루를 심고 사람들을 유혹했다.

1924년부터는 색등을 밝히며 밤 벚꽃놀이를 즐기도록 했고 창경궁은 그야말로 떠들썩한 유원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벚꽃 놀이는 계속 됐고, 밀려드는 관람객으로 인한 소동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이 벚꽃 축제로 들떠있는 우리네 봄 풍경을 저 바다 건너 나라의 위정자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벚꽃 축제를 그만둬야 한다거나 즐기지 말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나 역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꽃길을 걸을 것이다. 다만 아름다운 꽃 뒤에 숨겨져 있는 역사의 야만과 상처를 굳이 끄집어내고 기억해야 한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애써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을 손꼽게 되는, 잔인한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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