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호
그 소리는 부지불식간에 아련히 먼 소리로 시작되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저 멀리서 가을이 오고 있는 것이다.
입추를 지난 지는 오래고, 처서도 벌써 일주일도 더 전에 지나왔다.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절반너머 기세가 꺾였다. 금년 여름은 긴 열대야로 잠 못 드는 밤이 많기는 했지만 태풍도 약하게 한두 번 정도로 그쳤고, 국지성 집중호우 몇 번 외에는 지루하도록 오래 끈 장마다운 장마도 없었다. 물론 아직은 이것으로 다 끝이 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느 지막이 태풍이나 장마가 또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찾아올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잘 맞혀지지 않는 기상대는 아예 예보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러는 게 속편하다는 속사정인 모양이다. 글쎄 잘 맞지도 않는 그런 기상예보를 듣고 짜증내기 보다는 차라리 듣지 않는 게 우리 쪽으로서도 훨씬 속편한 노릇인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은 순서대로 한 가지씩 시작하여 조금씩 늘려 오는 것이 아니다. 한꺼번에 시작하고서는 누에가 뽕잎을 먹듯 야금거리며 온다. 그러나 그 속도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시차는 있지만, 밀물이 밀려오듯이 온다. 인해전술로 달려드는 병정들이 사방에서 끝도 없이 몰려들듯이 그것들은 한꺼번에 와하고 닥쳐드는 것이다.
처서에 장벼 패듯 가을은 그렇게 몰려온다.
몰려온 가을이 사방을 가득 메운다. 마침내 온 천지가 가을마당으로 변했다. 들판에 나서보라.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당신이 익숙해져 있는 소리, 달밤에 한적한 곳에서 여인네 옷벗는 그 소리와는 다른, 소리 못 듣는가. 가을이 자연을 옷 갈아입히는 소리, 대자연이 털갈이 하는 소리다.
산이 바스락거리며 옷 갈아입는 소리, 벼 이삭이 고개 더 숙이느라 목 늘어나는 소리, 고구마 몸 불리느라 땅 갈라지는 소리들.
고추밭에 나서보라. 고추가 어찌해서 빨갛게 변해 가는지를 생각하다보면 초록이 물드는 소리가 들린다. 저 너머 과수원에서 능금이 익는 소리도 뽀드득 하고 들려온다. 어딘가에서는 벌써 너무 익어버린 감 하나 떨어지는 소리 ‘툭!’ 하고 들린다.
뿐만 아니다. 오만 가지 소리가 다 들려온다. 협주곡이다. 거대하고 우렁찬 교향악이다. 자연이 연주하는 오묘한 음색이 골골이 틈틈이 고루고루 스며들고 있다. 귀로 듣기보다 몸으로 느끼는 소리다. 몸이 느끼지 못한다면 생각으로라도 꼭 느껴야만 할 소리다. 몸으로 느껴서 귀로 그려내고 간직해야 할 소리이다.
아, 어느새 바람도 가을바람이다. 가을바람이라 소슬소슬하다, 그리 분다. 하늘도 가을하늘이다. 가을하늘이라 저리도 푸르고, 높기도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마냥 높아만 간다. ‘돌을 던지면 쨍하고 금이 갈 것 같은’ 정말 그런 하늘이다.
가을은 성큼 다가서서는 모른 체 서 있다. 그 옆에 나란히 서서 나 또한 모른 체 짐짓 뒷짐을 진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 마지막 과실을 익게 하시고 /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릴케(Rainer Maria Rilke)가 ‘가을날’을 노래한 시이다. 결실의 가을에 대한 외경심과 모든 생물체의 완성을 기원하는 마음과 동면의 겨울에 고독하게 방황할 불안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을 들판에 나서는 누구의 마음도 다 이러할 것이다.
김현승은 ‘가을의 기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런 기도 함께 드리고 싶어지지 않는가.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가을이 오는 소리는 겨울을 재촉하는 소리다. 여름을 어서 떠나라고 채근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셀리(Percy Bysshe Shelley)는 ‘서풍부(賦)’에서 시작과 끝을 이렇게 읊었다.
“오 거센 서풍, 그대 가을의 숨결이여 (중략)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다 하리오? ”
이제 가을이 왔으니 어찌 겨울이 멀다 할 것인가. 서둘러 겨울채비에 나서야 할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