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은 인원은 모두 39명에 이른다. 이중 이인정, 한운석, 김양칠, 송재만은 항소와 상고를 통해 끝까지 법정투쟁을 이어 갔지만, 남주원은 1919년 10월25일 1심 선고 이후 별도의 항소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로써 남주원에 대한 공주지방법원 1심 판결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남주원이 출감한 것은 1920년 10월23일이었다. 1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실제 징역살이는 꼬박 1년6개월을 한 셈이 된다. 이렇듯 일제의 법집행은 합법을 가장한 독립운동 탄압이었다.

징역살이를 마치고 대호지로 돌아온 남주원은 이후 재산을 처분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남주원은 원래 대호지의 대표적인 부호였다. 남주원의 재산은 대호지면 전역에 걸쳐 전답만 200필지 21만평이 넘었던 것이 확인된다. 또한 남주원의 대호지면 사성리 본가는 대지만 2,433평에 달했고, 100간이 넘는 대저택이었다. 따라서 남주원의 집에는 식솔들이 많았고, 이들 역시 남주원과 함께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은 같은 주소를 가지고 처벌 받았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남주원은 막대한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 필요한 경비를 책임졌다. 그러니 주변에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남병사 댁’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 회자되었던 것이고, 실제로 남주원이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남주원은 1년6개월의 징역살이를 마친 후 그 많았던 재산을 모두 처분하였다. 그것도 1921년 6월부터 1922년 1월까지 6개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매각하였다. 이렇게 일시에 재산을 모두 처분하였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당시 일제는 막대한 재판 비용을 피고인들에게 전가하였고, 이로 인해 피고인들은 재판 비용을 갚기 위해 빚을 지거나 재산을 처분해야 했다.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처벌받은 주변 사람들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재판비용 변재 문제와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아무튼 남주원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갑작스럽게 재산을 처분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모든 재산을 처분한 남주원은 이후 뚜렷한 활동 기록이 없다. 조상 대대로 살았던 대호지를 떠나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처음 이사간 곳은 1922년 4월의 일로 경성부 예지동이었다. 이어 경성부 죽림동으로 이사하였고, 1926년에는 경기도 시흥군 남면 당정리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듬해인 1927년에는 고향과 가까운 아산군 염치면 백암리로 이사하였다. 한동안 아산에서 생활하던 남주원은 1935년 서산군 부석면 지산리로 이사하였다. 그리고 해방을 맞은 이듬해인 1946년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이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이후이다. 그 후 1982년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처벌받았던 판결문이 발견되면서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남주원 역시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남주원은 막대한 재산을 가졌던 부자였고, 향촌사회에서 존경받는 유지였다. 또한 신식교육을 받은 젊은 신지식인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남주원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부를 누리며 편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남주원은 개인의 안락함 보다 3.1혁명의 거대한 물줄기를 선택하였다. 자신의 부를 누리기보다는 그 재산을 아끼지 않고 독립운동하는데 썼다. 그렇기에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성공할 수 있었고, 오늘날 3.1혁명 100주년을 맞아 더욱 빛날 수 있었다. 그것이 남주원을 기억해야 할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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