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제의 눈을 피해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다. 1919년 당시는 일제가 3.1혁명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잔혹한 탄압도 서슴치 않았던 때였다. 이러한 탄압에도 3.1혁명이 격화되자 일제는 감시와 탄압은 물론 밀정을 보내 정보 수집을 하고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사전에 알아내서 독립만세운동을 좌절시키려 하였다. 따라서 대호지에서도 일제의 감시를 따돌리고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비밀스런 준비가 필요했다. 남주원은 원래부터 손님의 출입이 잦았던 자신의 사성리 집에서 자연스럽게 모임을 가졌다. 주로 이두하, 이대하 등 젊은 층이 남주원의 사성리 집에 모여들었다. 그래도 불안 요소가 있을지 몰라 모임은 밤에 이루어졌고, 모임이 있는 날이면 밀정들의 감시가 있을까 해서 보초를 세우는 등 만반의 대비를 하였다. 그리고 독립만세운동에 필요한 경비는 대호지에서 가장 재력이 넉넉했던 남주원이 도맡아 해결하였다.

대호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는 세력은 남주원을 중심으로 한 청년층만이 아니었다. 대호지면에서 면서기들도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천도교인들도 별도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치면서 독립만세운동의 규모는 자연스럽게 대호지면민 전체가 참여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대호지면민들이 전체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면장인 이인정이 앞장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마침 남주원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이대하는 면장인 이인정의 조카였고, 남주원의 친한 친구인 이두하는 이인정의 장남이었다. 아들과 조카, 아들의 가장 친한 친구가 앞장서는 독립만세운동에 현역 면장인 이인정이 동참하였다. 현역 면장인 이인정이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함으로써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이미 성공한 것과 다름없었다. 

마침내 4월4일 오전 8시, 대호지면 사무소 앞에는 4,5백명의 면민들이 모여들었다. 천의장터에서 가까운 마을의 일부 면민들은 천의장터로 가는 길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막상 송재만이 준비한 태극기가 휘날리고, 한운석이 쓴 애국가를 인쇄하여 돌려지자 면민들의 표정은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남주원은 이런 면민들에게 술을 대접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리고 면민들이 가득한 자리에서 남주원은 경성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독립만세의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천의장터로 향한 시위대는 장터에 이르러 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천의장터에 도착한 시위대는 줄을 이루어 천의장터와 정미면사무소 주위를 돌면서 평화로운 시위를 전개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남주원은 천의장터 한복판에서 경성에서 본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고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남주원의 연설이 이어지자 그동안 지켜보고 있던 일제 순사들이 당진경찰서에서 온 순사들과 합세하여 연설을 중단시키고 태극기를 빼앗으려 덤벼들었다. 평화롭게 진행되던 시위는 이때부터 격화되었다. 시위를 저지하던 일제 순사들은 성난 시위대에 붙잡혀 얻어터졌고 시위대가 시키는 대로 독립만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천의경찰주재소는 파괴되었다.

이러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인근 내포지방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중 가장 격렬하게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에 따라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에 붙잡혀 처벌받았다. 남주원 역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붙잡혀 구속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보도하면서 대호지·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이인정과 함께 남주원이 체포되어 당진경찰서에서 취조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후 남주원은 공주형무소에 갇혔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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