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아름숲 기자단]

3·1운동 100주년, 그 의미를 새로 새기다.

이다은 기자(계성초6) blessme0508@naver.com
이다은 기자(계성초6) blessme0508@naver.com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공연, 전시 등 역사 관련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3·1운동을 단순히 만세운동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한민국은 헌법 정신과 ‘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 건국의 원천이 3·1운동에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올바른 의사를 당당하게 발표하라”라는 외침, 그리고 그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에게 3·1운동의 의미와 정신은 무엇인지 되짚어보자.

3·1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와 고종황제의 승하, 평화 원칙의 하나인 민족자결주의 (한 민족이 그들 국가의 독립 문제를 스스로 결정짓게 하자는 원칙)를 배경으로 일어난 독립운동이다. 3·1 독립운동에 앞서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한인 학생들이 발표 한 2.8 독립선언서는 3·1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선언서는 송계백에 의해 국내로 전해졌고, 3월 1일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역사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서울, 평양, 의주, 원산 등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은 짧은 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5월 말까지 3개월 이상 계속되었다. 일본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서도 2000여 회의 크고 작은 만세운동과 200만 명 이상의 참가자, 그리고 국내를 넘어 중국 동부, 만주, 러시아 연해주, 미국, 일본 등 재외 동포들에게까지 이어졌다.

3·1운동 이후 모든 분야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또한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간 광주학생운동 등 3·1운동을 잇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도의 비폭력운동과 중국의 5·4 운동, 필리핀과 이집트에서의 독립 시위 등 20세기 초 아시아,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영향을 주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의 두 개의 정부 수립, 6·25전쟁, 민주화, 외환위기 등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다. 하지만 힘을 하나로 모을 때 민족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보여준 3·1운동의 정신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빠르게 대한민국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2019년을 살아가는 미래 세대에게도 이어져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으로 이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외쳤던 3·1운동, 그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찾아 기억하고, 곳곳에 독립유적지를 교육에 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도 하루 빨리 해결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3.1절, 3·1 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3·1운동의 의미를 새로 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최초의 여성의병장 윤희순...귀한 쓰임을 만들어낸 여성독립운동가

최예린 기자(계성초5) yerinveronica@naver.com
최예린 기자(계성초5) yerinveronica@naver.com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그 중에는 윤희순 열사도 있다. 윤희순 열사는 나와 같은 평범한 여자였다. 윤희순 열사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생각해봤다.

윤희순은 18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열여섯 살에 유제원과 결혼했다.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사람들에게 단발령을 내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머리카락은 부모님께서 주신 것이라며 반발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안사람 의병가를 만들어 전파했고 그녀의 시아버지인 유홍석은 항일투쟁에 앞섰다.

“아무리 왜놈들이 포악하고 강성한들. 우리도 뭉쳐지면 왜놈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사랑 모를쏘냐”(안사람 의병가)

안사람 의병가는 여성의 역할인 안사람을 강조해서 표현했다. 또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힘을 보태면 모든지 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강원도 춘천지역의 유생과 선비들의 아내 30여명을 모아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했고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 여성의병장이 되었다. 의병단은 전투에 쓸 무기와 화약을 만들었고 군인들에게 돈을 전달했다.

윤희순 열사
윤희순 열사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그녀의 가족은 중국 만주로 가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고 노학당 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1913년과 1915년, 시아버지와 남편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윤희순과 아들 유돈상은 함께 무순 포가둔으로 옮겨 항일운동을 이어갔다. 간도참변이 일어나고 일본군들이 죄 없는 우리나라사람들 3000여명을 죽였다. 윤희순은 애국지사들과 조선독립단을 창설했다. 낮에는 농사, 밤에는 군사훈련을 했다. 그녀 나이 61세였다. 그녀가 세운 조선독립단학교는 일본군이  불태워버렸고 아들은 심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11일 후 윤희순도 아들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윤희순은 한 집안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 할머니로서 그 역할에 충실했고 집안을 이끄는 평범한 어머니였다. 열심히 노력한 독립운동가였지만 아들 앞에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애틋하게 느껴졌다. 내가 1910년에 살았더라면 윤희순처럼 나라를 위해 모든 걸 바쳤을까? 나는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 같다. 윤희순은 시아버지, 남편, 아들을 모두 잃어서 불쌍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한 것 같다. 나도 같은 여자로서 윤희순의 모습을 본받고 싶다.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도 작은 곳에서 큰 역할을 했을 것 같다. 감사하고 고맙다. 

 


잊혀지는 독립운동가, 없어져가는 독립유적지...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 손병희 선생을 기억하며

정성지 기자(당진중 1학년) james2081@naver.com
정성지 기자(당진중 1학년) james2081@naver.com

곧 다가오는 3월 1일, 3.1 절이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편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겼을 때 되찾으려고 노력하셨던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그분들 덕에 우리는 편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3.1절 100주년을 맞이하는 의미에서 그분들을 기억해본다.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등 유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립운동가가 훨씬 많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당진과 관련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려고 한다. 그분은 바로 손병희 선생님이다. 이분은 생전에 당진에 살았던 분으로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천도교의 지도자로도 많은 일을 했다.

손병희 선생님이 한 말씀 중에 내 마음에 와 닿은 말은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분은 민족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문을 인쇄하고 낭독했다. 또한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을 알아야 한다고 새로운 문명을 배우게 하고자 일본유학을 주선해 유학생이 많이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결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돌아가셨다.

손병희 선생
손병희 선생

이 고마운 선생이 생전에 살았던 집이 당진 수청지구에 있다. 이 집에서 손병희선생이 최고직책인 동학대도소역할도 하였다. 또한 최시형이 처형되자 최고 지도부도 은신했던 장소이다. 이런 곳이 수청2지구 도시개발로 없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개발도 좋지만 우리가 독립운동가를 기억해야하는 장소로 보존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를 존경하는 마음, 그마음을 속으로만 갖지말고 표현해보자. 표현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방법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가지기,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땅이라고 우기는 문제를 정확히 공부해두기, 국경일 날 관심가지고 참여하기, 묵념시간에 집중하기 등이다. 이런 작은 실천으로 더 빛나는 3.1절을 만들어 보자.

 


세계를 항해 외치다. “대한독립만세!!”

송승주 기자(원당중1) thdtmdwn06@naver.com
송승주 기자(원당중1) thdtmdwn06@naver.com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 1918년 1월 미국 월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 주의를 주장 했다 다음 해인 2월 8일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 했고. 한 달 뒤 각국에서 귀국한 독립 운동가들이 3.1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일본의 눈을 피해 태화루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 한 후 체포 되어 파고다 공원에 모인 학생들과 어른들이 3.1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그 후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당진에서도 3.10 만세운동과 4.4 대호지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두 곳을 소개하려고 한다.

학생들이 외친 3.10만세운동
3.10 만세운동을 계획한 학생들이 다녔던 면천보통학교 직접 가서 보니 가보니 터만 남아 있었고 면천초등학교를 알아 볼 수 있는 입구만 남아 있다. 밑으로 내려가면 3.10운동을 기념하는 탑이 세워져 있다. 그 탑에는 이종원 선생의 3.10운동 거사록이 쓰여져 있다. 원용은 선생은 가족과 함께 상경해 3.1운동을 보고 우리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진으로 돌아와 박창식에게 3.1운동을 설명 한 뒤 학교에서 가장 높은 학년인 4학년 급장 이종원 등에게 알린다. 3.1운동에 대해 들은 박창식은 덕산보통학교, 당진보통학교에 밀서를 보내 학생을 모으기 시작했다. 면천보통학교에서 학생들은 태극기와 현수막을 만들게 된다.

그 후 3월 10일 육군 기념일 행사 날 오후 4시에 학생들 94명이 저수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무장한 일본경찰에 쫓겨 흩어진 원용은과 박창식은 아미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르고 원용은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경찰이 원용은을 체포한다는 걸 알고 밀서를 보냈지만 원용은은 학교에 가 당당하게 체포되고 박창식은 원용은이 경찰에게 체포 된 것을 알고 원용은과 같이 면천경관주재소에 수감 된다. 원용은과 박창식은 4개월 동안 공주형무소에 수감 된다

대호지에서 외친 대한독립만세!!!!
대호지 공원 주차장 쪽에 가면 탑이 세워져 있다. 그 탑에는 4.4운동에서 부른 애국가가 적혀 있다. 그리고 그 탑에서 도로를 건너면 4.4운동 기념탑이 있다. 자수로 만든 태극기 모형의 탑도 있었다. 대호지면 4.4운동은 유림들이 3.1운동을 보고 당진으로 내려와 면장을 먼저 설득하고 애국가와 태극기를 자수로 만들며 만세운동을 준비 했다.  도로를 정비한다는 핑계로 600명이 모이게 되고 3.1만세운동을 알리고 ‘간교한 일본은 강제로 합방을 주장해 드디어 내 나라를 악탈했다.’ 라는 운동가를 부르며 천의 장터로 향한다. 대호지면 천의리 4.4운동은 시작 할 땐 평화운동이었으나 끝날 쯤 폭력 운동이 된다. 시위를 하던 중 일본 경찰이 쏜 총으로 한 명이 죽자 분노한 사람들은 돌을 던지게 되었다.

얼마 전 ‘말모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데도 전국의 우리말을 모으고 지켜내는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김판수는 한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잃어 가면서도 우리의 한글을 지켰다. 이 시기에는 우리의 것을 지키려는 노력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그 중 일제 강점기의 3.1운동은 우리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역사라고 생각 한다. 만약 3.1운동을 통해 세계에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5.4운동 같이 주변국 등이 독립의 목소리를 내는 용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3.1운동 정신은 어떠한 어려운 일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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