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 창의사
대호지 창의사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대호지와 정미면은 1895년 조선말기 군현을 정비하면서 해미군에 속해 있었다. 이후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해미군, 태안군이 서산군에 편입되면서 해미군에 속해 있던 대호지와 정미면도 서산군의 20개 면으로 속하게 되었다. 대호지와 정미면이 당진군으로 편입된 것은 최근의 일로 1957년이다.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4일에 일어났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충청도 전역에서도 3월 말, 4월 초에 독립만세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다. 대호지 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도 이때 일어났다.

대호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고종의 인산을 보기 위해 경성에 갔던 남주원, 이두하, 남계창, 남상직, 남상락이 경성에서 3.1혁명을 목격한 후 귀향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면서 부터였다. 이후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면사무소에서 천의장이 서는 4월4일을 골라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도로 정비를 하겠다며 면민을 소집하였고, 다수의 면민이 모이자 면장인 이인정이 독립만세운동을 제안하는 연설을 하였고, 남주원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면사무소에 모인 면민의 반응은 뜨거웠다. 지도부는 계획했던 대로 천의장으로 이동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천의장터에 도착한 이후에는 장꾼까지 합세하면서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천의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제는 가까운 당진경찰서 순사를 동원하여 평화롭게 시위하던 시위대에 총을 발사하여 4명을 다치게 하였다.

하지만 이미 장꾼까지 합세하여 규모가 확대된 시위대는 일본 순사를 구타하고 정미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는 등 평화적인 독립만세운동은 격렬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독립만세운동이 확대되자 일제는 시위 주동자를 찾는다며 군경을 동원하여 강경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날의 항거로 수많은 구속자가 생겼고, 현장 학살 1명, 옥중 고문치사 3명 등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특징은 대호지면의 면서기들이 중심이 되어 대호지면의 면장에서부터 면민에 이르기까지 면민 다수가 참여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이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천도교인들의 조직적 개입과 참여 그리고 대호지의 유림들이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또한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 면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천의장터로 이동하면서 주변의 많은 주민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다양한 민중이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1혁명 과정에서 전국에서 수많은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지만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처럼 전 면민이 다수가 참여하여 조직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경우는 드물었다. 따라서 대호지 천의장터에서 벌어진 4.4독립만세운동은 주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인근 지역에서도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곳곳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대호지 천의장터 독립만세운동의 특징에 따라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하여 실천했던 세력을 살펴보면, 인위적인 구분이 무의미하다 싶을 정도로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것이었지만, 대호지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던 이인정 면장을 비롯한 송재만 등 면서기 집단과 백남덕, 민재봉 등 천도교 세력, 남주원 등 도호의숙 중심의 유림세력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겠다. 이들 주도 세력들은 인적 구성이 다르고 성향이 달랐으며 출발선이 달랐지만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다는 목표와 방향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만세운동이라는 큰 틀에서 작은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고 하나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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