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오피니언] 설날 아침의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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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진신문
  • 승인 2019.02.04 07:00
  • 호수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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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범(수필가, 전 교육공무원)

[당진신문=김종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 대부분의 인사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다. 정년퇴임한 어느 교장선생님의 대답이 걸작이다. “먹는 일로 바쁘다.”고 말한다. 무엇을 그리 바쁘도록 먹는단 말인가? 언뜻 들어 농담이나 너스레 같지만 음미해 보면 수긍이 간다. 산다는 것은 밥이나 물만 먹는 것이 아니다. 세월도 먹고, 나이도 먹고, 또 약도 먹고, 눈치도 먹고, 욕도 먹고, 때로는 겁도 먹고, 애도 먹고, 게다가 마음까지도 수시로 바꿔 먹어야 한다.

나 또한 어찌 다르랴. 생각해 보면 먹는 게 수도 없이 많다. 산다는 것은 전부가 먹는 것이다. 먹는 것은 곧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다.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에 대한 정답은 없다. 누구나 나이 먹는 건 피할 수 없다. 쉼 없이 먹어야 하는 게 세월이고 나이다. 음식을 먹는 것은 고픈 배만 채우면 끝이다. 그리고 음식은 먹으면 소화되고 배설되지만 세월과 나이는 먹을수록 쌓여 죽음의 원인이 된다. 먹은 나이가 쌓이면 약도 먹어야 하고, 병원 다니며 돈도 까먹어야 한다. 점점 내가 한 말과 행동도 책임질 수 없을 만큼 가물가물 정신까지 까먹게 된다. 맛도 모르고, 양도 모르지만 나이 먹을수록 제일 많이 까먹는 게 정신이다. 잊어먹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끝내는 소중한 약속까지도 까먹게 된다. 먹는 것 중에서도 잊어먹는 것만큼 서글픈 것도 없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친구들의 인사는 나이 들어 일선에서 은퇴한 인생들끼리 자조적 푸념일 수밖에 없다. 세월은 흐른다고 하고, 나이는 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이나, 먹는 나이나 의미는 다르지 않다. 그 세월에 그 나이다. 나이는 누가 먹으라고 해서 먹는 것도 아니고, 또 먹기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다.

맛도 모르고 먹는 게 나이다. 또 먹을수록 체력과 기력이 약해지는 게 나이다. 나이는 먹을수록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내 가족들조차도 관심이 옛날 같지 않다. 은퇴라는 이름은 사회구성원 대열에서 밀려나는 죄(罪)명이다. ‘은퇴’란 단순하게 퇴직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아무리 대범한 척 해도 은퇴란 서러운 말이다. 하루 한시도 건너뜀 없이 열심히 살아왔건만, 삶은 어느새 회기점을 타고 넘어 석양빛 막다른 골목에 접어든 것이다. 세월이 허무해지고, 야속해지는 이유다.

나는 어떤 마음을 얼마만큼 먹고 살아왔는가. “삶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속담은 철학이고 진실이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많이 먹고 사는 게 세월이고 마음이다. 좋은 마음 먹고 성공하는 인생도 있고, 나쁜 마음 먹고 실패하는 인생도 있다. 마음 먹기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

슬퍼서, 기뻐서, 또는 알게 모르게 내가 머금고 삼킨 눈물도 헤아릴 수 없다. 구절양장(九折羊腸) 험준한 애환의 언덕을 기어올라 이제 겨우 무거운 등짐 벗어놓고 고달팠던 옛 길 되돌아보며 가쁜 숨을 돌린다. 속절없는 인생은 어느덧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죽음까지 떠올려야 하는 종점 앞에 다달았다. 먹은 나이를 되돌아보고, 흐른 세월을 반성해 본다. 살아오는 동안 내가 먹은 것은 또 있다. 안절부절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 같은 애도 먹어야 했고, 또 생사를 가르는 위급한 기로에서 많은 겁도 먹어야 했다. 경쟁을 동반해야 하는 삶의 이치는 누구나 같다. 경우에 따라선 가시 돋친 돈에 유혹돼 잘못 먹고 패가망신하는 인생도 숱하게 보았다.

이 세상에 떠도는 온갖 부정비리는 모두 잘못 먹은 돈 때문이다. 자살로 끝내야 했던 어느 전직 대통령의 비극도 잘못 먹은 돈 때문이 아니던가. 식성은 타고 나는 본능이라지만 먹기 때문에 죽는 것 또한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