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역사산책] 면천공립보통학교 3.10만세 시위를 주도한 박창신Ⅱ
[당진신문 역사산책] 면천공립보통학교 3.10만세 시위를 주도한 박창신Ⅱ
  •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9.01.25 07:30
  • 호수 1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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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박창신
박창신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몽산 기슭에서 출발한 면천보통학교 학생들은 면천향교를 지나 면천읍내로 향했다. 면천공립보통학교 전교생 모두가 참여한 독립만세운동은 학생들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조직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고창하였다. 박창신은 학생 대열의 선두에 서서 원용은과 함께 깃대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대오를 이끌었다. 그리고 독립만세운동을 마친 후에도 주동자를 자처하며 일제 경찰이 있는 면천 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였다. 이러한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당당한 조직적 대응에 일제는 주동자 박창신과 원용은을 구속하여 공주형무소에 수감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가 보통학교 어린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에 대해 구속시키면서 까지 처벌하고자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충남 최초의 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이었기에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으로 본보기로 삼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하지만 기소단계에서 검사의 불기소 처분으로 사건이 마무리되었다. 이유는 증거 불충분이었지만 보통학교 학생들까지 구속시켜 처벌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일제는 3월21일 검사의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해야할 박창신과 원용은을 4개월이나 더 공주형무소에 가두어 두었다. 불법 구금을 계속한 것이다. 그 바람에 박창신은 19명이 졸업한 3월27일 면천공립보통학교 7회 졸업생으로 졸업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는 박창신과 원용은에 대해 퇴학 처분하고, 학적부에서 이들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다. 따라서 면천공립보통학교 공적 서류에는 박창신에 대한 기록이 없다.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한 박창신은 이후 합덕성당에서 운영하던 사립 매괴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매괴학교는 합덕성당 크램프(Krempff) 신부가 1907년 설립하여 1908년 6월14일 개교한 4년제 초등교육기관이었다. 매괴학교는 합덕성당에서 설립 운영한 카톨릭계 사립학교였지만 학생 모집에서는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았다. 박창신이 매괴학교에서 학업을 이어 가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던 것이다.

매괴학교를 졸업한 이후 박창신은 합덕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6월 10일 합덕면민들의 불이익을 시정하기 위해 열린 합덕면민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참여한 것을 필두로, 1928년에는 당진기자동맹 창설에 참여하였고, 신간회 당진지회와 당진청년동맹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같은 시기 면천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 운동의 주역이던 원용은도 합덕에서 사법서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박창신과 달리 원용은은 사법서사 업무외에 사회활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이런 사정으로 박창신과 원용은은 같은 시기 합덕에서 생활하였지만 서로 함께 하지는 못했다.

이상과 같은 박창신의 활동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전개하였던 민족해방운동의 한 형태였다. 실제로 박창신은 1932년 1월25일 주윤흥과 함께 합덕 주재소에 체포되어 서울 종로경찰서로 이송되었는데, 당시 신문기사에는 재건 공산당사건이라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박창신은 이 시기 사회주의 활동가로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창신의 활동은 꼭 합덕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한 박창신은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고 하고, 국내에 있으면서 공유수면 매립 신청을 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박창신의 활동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 중 합덕면 인민위원장을 맡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희생되었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박창신의 죽음을 알려준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시체를 찾아 매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무덤은 합덕읍 대전리 내동에 있다.

박창신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3.1혁명을 통해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독립운동가의 최후로는 너무나 비참했다. 그렇게도 그리던 해방된 조국은 한 독립운동가를 지켜주지 못했다. 이렇듯 한국 현대사는 아픈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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