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체포돼 여순 감옥에 갇혔다가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교과서를 통해서 배워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전부입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 신문사 문화탐방단 일행이 중국 대련으로 가는 오전 9시4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충남 당진에서 10일 새벽5시 이슬을 헤치며 고속도로를 달립니다.

일행은 인천공항을 출발, 중국 대련에 도착해 안중근 의사 등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된 여순 감옥과 재판을 받았던 관동법원지구를 돌아보았습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먼저 찾아 본 관동법원지구는 일본이 여순을 점령했을 당시 세운 일본 법원이라고 설명해줍니다.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재판을 받았던 곳입니다. 탐방에 동행한 서재랑 어린이(당진 탑동초3)는 딱딱하고 차디 찬 죄수 의자에 앉아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안중근 의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봅니다.

안중근 의사 영정 앞에 선 우리 모두는 일제히 고개 숙여 묵념하며 감사한 마음, 고마운 마음,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아픈 마음이 교차하고, 돌아 나오면서 먹먹해진 가슴에 누구도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공판정에서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을 뿐 이라고 말하며 재판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무려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지만 이 과정들은 모두 일본인들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된 것이었을 뿐 결국 2월 14일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렇게 일제강점기 형무소였던 여순감옥으로 안중근 의사는 이송됩니다.

안중근 의사를 태운 마차는 여순감옥을 향합니다. 우리는 마차 대신 버스를 타고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이동합니다.

“안중근 의사 사진을 보면 손가락 한 개가 새끼손가락만큼 짧아요. 왜 그런 거예요?”

“1909년, 안중근 의사는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결성했습니다. 이들 12명은 위태로워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기로 맹세하고 왼손 약지를 끊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새겼습니다. 그래서 약지가 짧은 겁니다.”

버스로 잠깐 이동하는 동안 서재랑 어린이의 질문에 가이드가 친절하고 상세하게 답해줍니다.

금새 도착한 이곳은 275개의 여러 형태의 감방이 있고 2천여 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규모입니다. 형무소는 담장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는데, 붉은 담장 안에는 수색실, 고문실, 사형집행실, 15개의 공장 등이 있습니다.

중범죄자를 가뒀다는 아주 작은 암실은 밖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답답함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고문실에는 여려 행태의 고문 도구들이 전시돼 있었는데 사지를 고정하고 발톱이나 손톱 사이에 쇠바늘을 박아 넣는 등 사진에조차 담고 싶지 않을 만큼 잔혹함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쇠사슬로 채찍질을 하고 난 후 베 가마니를 덮어 다음날 피와 범벅이 되어 말라 붙어버린 가마니를 떼어내면 딱지가 떨어져 피투성이가 된 부위에 또다시 채찍질이 이어졌습니다.

설명을 들을 때마다 그 아픔이, 그 고통이 그대로 우리들 모두에게 전해져와 이마를 찡그립니다. 가슴을 움켜쥡니다.

“지금 꼭 내 아들과 같은 나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지 더욱 가슴이 아프네요.”

“이 추운 바닥에서, 이 얇은 옷을 입고, 수도 없이 이어지는 고문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3월 26일이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당하신 날짜잖아요. 3월은 우리가 새학기를 맞이하고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는 참 설레이는 달이었는데 이제는 슬픈 3월이 되었어요. 그렇지만 안중근 의사는 우리가 슬퍼하기만 하면 실망하실걸요.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게 열심히 공부할거에요.”

함께한 일행들,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하소연 하듯 아픈 마음, 혹은 다짐을 표현합니다.

짧은 일정 속에 안중근 의사가 머물렀던 곳을 돌아보면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이유, 나라가 부강해야 할 이유를 찾고, 국가의 위기 속에 피어난 젊은이의 뜨겁고도 위대한 애국정신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뜻 깊은 탐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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