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원용은
원용은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일제가 이렇듯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 만세 운동을 강력하게 탄압했던 이유는 면천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운동이 충남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벌인 최초의 시위였기 때문이다. 충남에서 처음으로 터진 면천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주변지역의 학교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따라서 일제는 면천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 시위가 배후가 없을 수가 없다고 보고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수사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일제 경찰의 탄압에 맞서 원용은은 모든 것은 ‘혼자 했다’고 하고 ‘배후자가 따로 없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이렇게 원용은이 당당하고 일관되게 진술하자 일제 경찰도 배후가 없음을 알고 체포 당일인 3월12일 바로 당진경찰서로 이송하였다.

당시 당진에서는 3.1혁명의 영향으로 독립만세를 준비하거나 실천하는 사례가 여러 곳에서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당진경찰서장이 매우 온정적인 성품이어서 수없이 잡혀온 시위 주동자에 대해서 몇 대의 태형으로 훈방하거나 태형도 없이 하룻밤을 새우고 내 보냈다고 한다. 원용은의 경우도 당진경찰서장은 어린 학생이라서 속히 내 보내려고 하였지만 면천학교 교장인 이타하라(板原良鎚)가 들어 먹지 않아 부득이 공주로 넘기게 되었다고 면회 온 원용하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렇듯 원용은은 당진경찰서에서 수일간 구금되어 있다가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대전지방검찰청 공주지청의 검사는 원용은을 3월 21일에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 내렸다.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지 10일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일제는 3월 21일에 검사의 불기소 처분 결정으로 즉시 석방시켜야 할 원용은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공주형무소에서 4개월 동안이나 수감시켰다.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는 4학년으로 1919년 3월 27일 면천공립보통학교 제7회 졸업식에서 졸업했어야 할 원용은을 졸업시키지 않았다. 면천공립보통학교 교장인 이타하라의 짓이었다. 이타하라 교장은 원용은이 다음해인 1920년 담임교사였던 안인식의 도움으로 공주사범대학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공주사범대학에 ‘원용은은 사상이 불온하다’는 통지를 하여 원용은을 제명시키기까지 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공주사범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등교한 원용은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0만세 운동 재현 행사
3.10만세 운동 재현 행사

이후 원용은은 1920년 여름 면천공립보통학교를 8회로 졸업한 사촌동생 원용필과 함께 상경하여 6개월 속성과 부기학원을 다녔다. 다음해인 1921년에는 보성전문학교 법과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입학하였다. 하지만 원용은은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늙은 어머니와 병으로 신음하던 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원용은은 1925년 사법서사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합덕에서 개업하였다. 원용은은 사법서사를 하여 늙은 어머니, 형 원용하 부부와 6남매 그리고 자신의 부부와 4남매 등 모두 15명의 대가족을 부양하였다.

원용은은 1919년 당시 면천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0대의 어린 학생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경성에서 본 조선 민중의 3.1혁명은 원용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원용은은 고향에 돌아와 면천공립보통학교 3.10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것으로 곧바로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독립만세를 소리쳐 외치는 것이 독립에 기여하는 것이었기에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3.10독립만세 운동은 어린 학생들이 일제에 저항하여 시작한 충남 최초의 독립만세 운동이다. 이 독립만세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민족독립의 필요성을 주지시켜 주었다. 이후 당진에서는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에 저항하는 수많은 사회운동이 이어졌다. 그 저항 정신은 모두 3.1독립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원용은은 그 중심에 있었다.
※면천 3.10독립만세운동 재현 사진을 함께 게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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