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원용은
원용은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면천 읍내 독립만세 시위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원용은은 면천 읍내에서 시위를 마치고 도망치듯 쫓겨 온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 귀가하던 일부 학생들을 모아 몽산과 아미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조용한 산속에서 부르는 만세였지만 목청 것 소리쳐 만세를 부렀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에 주변 마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만나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원용은이 얼마나 열심히 돌아다니고 만세를 불렀던지 그날 밤 다리가 퉁퉁부어 다음날은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면천에서 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학생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는 간악한 일제의 속성을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주변에서는 이후 벌어질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원용은을 아꼈던 담임선생 안인식은 다음날 원용은에게 은밀히 인편을 통해 당분간 학교에 나오지 말고 피신해 있으라는 연락을 보내 왔다. 원용은의 가족과 친지들 역시 걱정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원용은은 그 다음날인 3월12일 주변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등교하겠다고 고집하였다. 그리고 의젓하게 학교에 나와 일제 순사들이 있는 면천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여 스스로 체포되었다. 면천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 시위를 함께 이끌었던 동급생 박창신 역시 자진 출두하여 체포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원용은과 박창신은 시위는 물론 이후 대처 방안에 대해서도 준비하고 대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3.10독립만세운동은 당시 『매일신보』에 3월17일과 26일에 두 차례에 걸쳐 보도되었다. 보도된 내용을 살펴보면,


沔川 면쳔- 셜유ᄒᆞ야 해산

당진군 면쳔 읍내 공립보통학교 학생 일동이 모혀 태극긔를 들고 대한독립만셰를 불넛ᄂᆞᆫ대 군슈와 경찰셔에셔 엄즁히 셜유해산ᄒᆞ얏더라.(317일자 31)

唐津 당진- 보통학교 생도

십일 오후 삼시경에 당진군 산쳔(汕川)보통학교생도 약 이백명이 구한국국긔를 행렬 션두에 셰우고 시위 운동을 시작ᄒᆞ얏는데 쥬모쟈 이명은 산쳔경관쥬재소에 인치되고 해산ᄒᆞ얏더라당진(326일자 31)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비
3.10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비

여기서 산천은 면천의 오기로 볼 것이고, 참여한 인원이 200명이라 한 것에 대해서는, 2009년 건립된 ‘면천공립보통학교 3월10일 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비’에 기록된 참가 인원이 ‘원용은 외 九十五명’ 즉 96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비문의 기록이 이종원의 회고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당시 참여자를 모두 기억하지 못한 측면과 당시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 시위에서 주변에 있던 주민들까지 포함하여 200명으로 보도했던 것으로 이해할 만하다.

이렇게 당시 보도대로 주모자인 원용은과 박창신이 면천경관주재소에 체포된 것으로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독립만세운동은 일단락되었지만 일제의 탄압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원용은과 박창신이 자진하여 면천경관주재소에 체포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일제는 3월13일 공주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과 기마병을 보냈다. 그것도 공주 헌병청의 경무부장이 직접 헌병을 인솔하여 면천으로 왔다. 어린 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에 헌병대 경무부장이 기마병까지 이끌고 면천으로 왔다는 것을 볼 때 3.1혁명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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