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 역사산책] 면천공립보통학교 3.10만세 시위를 주도한 원용은Ⅲ
[당진신문 역사산책] 면천공립보통학교 3.10만세 시위를 주도한 원용은Ⅲ
  • 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 승인 2018.12.29 08:00
  • 호수 12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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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원용은
원용은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10일 면천읍내에서 전개되었다. 3월10일을 거사일로 정한 이유는 3월10일이 일제의 육군기념행사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념행사가 열리면 학생들이 동원되어 행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행사가 끝나고 나면 학생들은 일찍 귀가하게 되어 시간적 여유가 생기게 되고, 이 점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듯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기념행사에 동원되어 참석한 후 일찍 귀가하게 되었다. 원용은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미리 준비했던 대로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 모두를 오후 3시경 면천 동문 밖의 산기슭에 모이게 했다. 이렇게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모두 모인 곳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확정할 수는 없으나, 원용은이 시위 도구를 준비하여 숨겨 놓았다는 곳이 성북리에서 면천향교를 향하는 산길이었다고 했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모인 곳 역시 면천향교 뒤편 쪽 인적이 드문 산기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기슭으로 모인 학생들은 미리 전 학년 급장을 통해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라는 비밀스런 뜻을 전달 받은 터라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전교생이 모두 모이자, 원용은은 높은 곳에 올라 자신이 서울에서 본 독립만세운동과 시위 장면을 설명하고 우리도 다 같이 면천에서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역설하였다. 한적한 산속이었지만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모두 합심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어 원용은이 미리 숨겨 두었던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 깃발을 꺼내 대나무 깃대에 매달고 면천읍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때 4학년 급장이었던 이종원은 대열의 선두에 서서 이끌었고, 부급장이던 박성은(朴性殷)은 대열 후미에서 학생들의 이탈이나 낙오가 없도록 독려하는 등 나름대로 치밀하게 준비했던 계획대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 대열의 선두는 주도 학생인 원용은과 박창신이 깃대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행진하였다.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행진을 시작한 시간은 대략 3시경으로 추정된다. 면천향교를 지나 면천읍내에 접어들면서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모습은 더욱 질서 정연하고 늠늠하였다. 마침 면천에 왔던 덕산공립보통학교 심상렬 선생이 이 모습을 보고 대열 앞에 와서 두손을 번쩍 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10만세 운동 재현 행사
3.10만세 운동 재현 행사

학생들의 의로운 행동에 적극적인 지지를 표시한 것이다.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은 큰 힘이 되었고, 크게 용기를 얻어 더욱 열광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를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면천 읍내로 들어온 학생들은 곧바로 학교 정문 앞까지 행진하였다. 학교에서는 만세 소리를 듣고 교사들이 깜짝 놀라 뛰어 나왔고, 학생들의 안전을 걱정하여 학생 대열 앞을 막으며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위세가 너무도 당당하여 쉽게 막아낼 수 없었다.

학생들은 잠시 면천공립보통학교 정문에 모여 당당하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서쪽으로 이동하여 면천경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일본 순사들은 학생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학생 만세 대열이 주재소 앞을 통과하자 비로소 알고 주재소를 뛰쳐나왔다. 순사들은 우선 선두에 있던 태극기와 깃발을 빼앗으며 강력히 저지하였다. 그러자 학생들은 대열이 무너지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일제 순사의 위세에 눌려 일시 흩어졌던 학생들은 곧바로 다시 모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조를 편성하여 맨손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일제 순사들은 어린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에도 총을 들고 진압하려 하였다. 순간 위급함을 안 박래윤, 안인식, 이홍로, 이돈하 선생들이 급히 학생들에게 가서 ‘목메는 소리’로 총을 맞을 수 있으니 어서 도망가라고 ‘호통’을 쳤다. 선생들의 간곡한 호소와 만류에 학생들은 대열을 해산하여 다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 일본 순사 다께사끼(竹崎)는 실제로 총을 들고 달려가 학생들을 추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날 시위로 학생들은 아무 사상자 없이 무사히 피신하였고 해산하여 각자 귀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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