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우 작가

[당진신문=이선우 작가] 아이들과 디베이트 수업을 할 때의 일이다. 개발도상국에서의 아동노동이 정당하다 라는 주제로 찬반 논리를 펼치는 시간. 준비과정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아동노동 착취 현황과 아동인권협약 등의 내용을 들려주고 질문을 던졌다. ‘어느 가난한 나라의, 너희들보다 어린 친구들이 무임금에 가까운 열악한 환경에서 손으로 직접 운동화를 꿰맨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그 운동화가 평소에 갖고 싶었던 브랜드를 달고 한정판 세일가 만원에 판매를 시작했다. 이 운동화를 사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동을 노예로 이용한 초콜릿을 연인과, 가족과 주고받으며 사랑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그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코코아 농장에 출근하는 어린이의 하루를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다. 국내외 여러 기업에서 만드는 휴대용 배터리의 원재료인 코발트 역시 아동노동 착취로 채굴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최신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움직이는 이면에는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의 피와 땀이 함께 움직인다. 그것이 정당하지 않거나 강요받는 일이라면 혹은 불합리하게 다른 누군가의 일상을 흔드는 일이라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고민해야 한다.

등교하는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기 위해 창밖을 보다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나온 한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다. 쓰레기통 뚜껑을 열다가 그만 다른 한 손에 붙들고 있던 봉투 끝을 놓치고 말았다. 와르르 쏟아지는 찰나, 그녀는 재빨리 몸을 피해 오물이 묻지는 않은 듯 했다. 하지만 주변은 눈뜨고 볼 수 없이 더러워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아주머니는 이내 자리를 떠나버렸다. 치울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바로 출근을 해야 할 다급한 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오물을 치울 사람은 그걸 만든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녀가 가끔 마주쳤을, 그리고 곧 이 자리에 다녀갈 청소부 아저씨에게 떠맡긴 불편함이 나에게까지 차올랐다.  

탄가루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업무를 빠뜨리지 않기 위해 업무일지를 촬영했다는 김용균씨. 연신 렌즈를 닦아내는 그의 얼굴이 찍힌 뉴스 영상을 보면서는 울컥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얼마 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안타까운 사고로 스러져간 스물 넷 청년 김용균씨의 보도를 접하면서 나는 차마 말 한 마디 보태지 못하고 울었다. 두 해 전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열아홉 비정규직 청년의 죽음과 다를 게 무언가. 또다른 비정규직 청년에게 위험을 떠맡기고 결국 죽음도 대신하게 만든 이 나라에, 이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의 시스템에 절망한다. 2년 전과 꼭 같은 모습으로 반복되는 상황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최소한 안전과 관련한 업무만큼은 직접 고용 정규직이 맡아야 한다는 야당의 요구’를 외면한 여당을 비판하던 정치인이 지금 우리들의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값싸게 갖고 싶은 운동화를 살 수 있게 된 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소비자는 죄가 없을까.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을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를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고용주는 죄가 없을까. 타인에게 혹은 약자에게 내맡겨진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는 삶은 과연 올바른가. ‘정규직 안 시켜줘도 되니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울먹이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애끓는 절규를 잊고, 죽은 자식을 둔 어미들의 비탄을 잊을까 두렵다.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날까 두렵고 똑같이 잊으며 무뎌질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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