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원용은과 함께 면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37명의 신입생들은 상급 학년으로 진급하면서 점차 인원이 줄었는데, 이들이 졸업할 때인 1919년 3월에는 11명만이 남아 졸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3.1혁명과 연관지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시대 상황이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된 초기였다고 해서 단순하게 원인을 알기 어렵다거나, 간단하게 일제에 의한 농촌 경제의 파탄에서 비롯된 경제적인 어려움이 반영된 결과였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3.1혁명이 준 영향은 당시 식민지 청년학생들에게 너무나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1918년도 2, 3학년 학생수가 각각 43명, 34명이었는데, 1919년 4월 1일에는 3, 4학년으로 진급했을 때는 재적인원이 각각 10명씩 극감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원용은이 다닌 옛 면천초등학교 교정.
원용은이 다닌 옛 면천초등학교 교정.

입학생이 부족하여 입학을 홍보할 정도였던 당시 상황에서 학부모의 성화로 학교에 입학한다 해도 학생들 스스로 일본말 교육 등 일제교육을 받기 싫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학생이 많았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벌어진 3.10독립만세운동은 많은 학생들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였던 원인 중 하나로 추정해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원용은을 비롯해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이 3.10독립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3.1혁명을 통해 형성된 반일 감정이 면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강하게 형성하게 하였고, 이러한 이유가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는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겠다.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3월10일에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진 것은 원용은이 경성에 상경하여 3.1혁명을 몸소 체험한 후 면천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원용은이 경성에서 언제 돌아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여러 가지 여건상 경성에서 오래 머물러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3월1일 고종의 인산이 끝난 후 하루 이틀 사이에는 귀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록 경성 방문 시간은 짧았지만 경성에서 본 3.1독립만세 시위는 어린 원용은의 민족의식을 깨우치게 할 만큼 강렬했다. 그 강렬한 경험이 3.10 면천공립보통학교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한 원용은은 우선 동급생이면서 두 살이 많고 민족의식이 강했던 박창신과 급장이던 이종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박창신과 이종원 역시 원용은의 말을 듣고 원용은과 함께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원용은은 박창신을 통해 인근의 당진공립보통학교와 덕산공립보통학교에도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경성고보 학생으로 면천공립보통학교 선배인 강선필에게 도움을 청했다. 마침 면천공립보통학교 선배인 강선필이 아버지에 이끌려 순성 성북리로 귀향해 있었다. 원용은은 손위 항렬의 원규상을 통해 강선필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원규상은 성북리 유동 출신으로 강선필과는 고향 친구이자 면천공립보통학교 후배였다. 원규상을 통해 후배 원용은의 도움 요청을 받은 강선필은 자신이 경성에서 가지고 온 여러 정보를 제공하였다. 강선필이 원용은에게 제공한 정보 중에는 경성에서 불리어졌던 노래도 있었다. 이 노래를 받아 ‘독립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수 백매를 등사하였다.

또한 원용은은 홀로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준비를 별도로 진행하였다. 마침 집에서 논을 팔아 보관하고 있던 돈이 있었는데 이 돈을 가져다가 당목(唐木)을 구입하여 집에서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는 글귀를 쓴 장폭(長幅) 10척의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태극기와 깃발 및 15~6척 이상의 대나무 깃대를 미리 동문 밖 저수지 군자정(君子亭) 북쪽의 면천향교 뒷산 소나무 숲에 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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