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당진면 읍내리에서 준비된 3월10일, 3월16일 시위가 천도교 중앙총부의 지침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당진출신 간부들의 역할과 관련해서이다.

당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당진출신으로 김현구, 박용태, 신태순을 들 수 있다. 김현구와 박용태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당진을 대표했던 접주였고, 당진에서 기포하여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내포지방 동학농민군과 함께 각종 전투를 지휘했던 인물이다. 김현구와 박용태는 동학농민전쟁이 끝난 이후 박인호와 함께 천도교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원래부터 덕포의 박인호와 연원이 있던 관계였고, 박인호가 천도교의 4대 대도주가 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주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 김현구는 1906년 2월10일 육임의 중정 및 금융관장대리 겸 금융원, 8월27일 금융관장을 지냈고, 박용태는 1907년 10월16일 도주 그리고 12월10일 정주교사 등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신태순.
신태순.

신태순 또한 당진면 대덕리 출신으로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서무과 대표로 활동하였다. 물론 이들 당진출신 천도교 중앙총부 간부들이 당진교구의 3.1독립 만세 시위와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기록으로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3.1혁명 당시 천도교는 전 교단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3.1혁명에 참여하였고, 전국의 천도교 조직을 동원하여 3.1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였을 때 천도교 4대 대도주였던 박인호의 절대적인 지지기반이었던 당진교구가 3.1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욱이 3.1혁명을 주도했던 손병희는 1년 3개월을 당진에서 피난살이를 하였던 인연도 있었다. 이러한 관계가 있었기에 3.1혁명에 관해 빠르게 정보를 접할 수 있었고, 당진면에서 3.1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천도교는 교인의 수에 따라 교구를 구분하였는데 교구는 100호 이상이 되는 구역에 설치했고, 교구가 10개 이상이 되는 곳에는 대교구를 설치했다. 이런 기준에 따라 3.1혁명 당시 충남에서 당진은 서산과 함께 대교구가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1919년 당시 당진교구는 대교구장을 김병태가 맡았고, 교구장은 박동현이 맡고 있었다. 따라서 3월10과 3월16일 당진면 읍내리에서 있었던 3.1독립 만세 시위는 이들 천도교 당진교구의 지도자들이 당진교구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1919년 당진에서 조직적으로 3.1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할 집단은 천도교 당진교구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3.1독립 만세 시위에 나섰던 종교단체는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당진에서 기독교와 불교도 중에서 3.1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나 사건은 없었다. 또한 유림 중에서는 영남 유림이 주도하여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 사건이 있었지만, 당진 출신 유림 중에 서명에 함께했던 인물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당진의 유림들 중에 조직적으로 3.1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할 수 있는 조직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듯 당진면에서 전개된 3.1혁명과 관련한 천도교 당진교구의 역할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당진출신으로 천도교를 대표할만한 인물로 신태순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신태순은 천도교 간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신태순은 1884년생으로 당진군 당진면 대덕리 토골 853번지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고향에서 한학을 배운 후 일찍이 천도교에 입교하였다. 1904년 김현구, 박용태 등과 함께 천도교 당진 교구를 창설하는 데 공헌을 할 정도로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신태순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고향 당진을 떠나 상경하였다. 이후 당진을 대표하는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한 신태순은 평생을 천도교 활동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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