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형 란 / 탑동초 교감
영정 속의 어머님은 어떻게 보면 웃고 계신 듯하였고 어떻게 보면 슬퍼보였다. 오랜 병석을 떨치고 안식처로 향하신 것을 생각하면 어머님의 모습이 평안해보이다가도 불효를 행한 후회로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바라본 어머님의 모습은 그런 나의 어리석은 모습을 나무라고 계시는 듯하였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다 그렇듯 어머님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혼란스런 혁명기를 차례로 겪으며 모진 세월을 사셨다. 하지만 어머님은 6남매를 번듯하게 키워내셨고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동안 전사가 되신 듯 강하고 담대한 모습으로 변하였다. 우리 며느리들에게 이런 어머님은 존경의 대상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고관절을 다쳐서 병석에 누우셨다. 연세가 많다보니 병원에서조차 더 이상 진전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별다른 대책이 없다 하여 집으로 퇴원하였다.
그리고 마침 보건소에 방문진료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욕창을 예방하고 환부를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어머님의 장례식이 치뤄지는 동안은 치열했던 당신의 삶만큼이나 날씨가 몹시 더웠다. 그 무더위를 무릅쓰고 찾아와주신 수많은 조문객들에게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잊을 수 없는 분들은 바로 보건소 방문진료팀이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그날도 그들은 어김없이 치료를 위해 집에 들렀다가 어머님 소식을 알고 곧바로 빈소를 찾았던 것이다. 그 동안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한 것으로 만족하고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직접 빈소까지 찾아와서 애도해 주다니.
병역의무를 이행하느라 보건소 근무를 자청했다는 아직 학생티가 가시지 않은 의사선생님과 천사 같은 모습의 두 간호사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흔히 요즈음 세상을 보고 인정이 메말랐다느니 이기적이라느니 걱정하지만 이런 분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그분들에게 받은 감동을 잘 간직하고 있다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그대로 옮겨 주리라. 아름다운 그들의 뒷모습에 대고 스스로 다짐하고 약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