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고등보통학생이 심대섭의 경우처럼 일제 경찰에 잡혀와 당당한 태도로 진술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이러한 심대섭이 당당하게 진술했다는 것은 일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조선총독부 판사 굴직희(堀直喜)는 심대섭에게 조롱하듯 조선인이 아무리 독립선언을 하고 만세를 부르며 다닌다고 독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취지의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 심대섭은 “만세를 부르는 것만으로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놓으면 언젠가는 독립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같이 운동하는 것이다”라고 흔들림 없이 진술하였다.


또한 장래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도 심대섭은 숨기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또 할 것이라고 당당히 진술하였다. 이렇게 당당한 진술 태도를 보이는 심대섭이었기에 일제의 입장에서는 단순 가담자에 불과하였지만 기소하여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는 3.1혁명에서 조선인의 단순한 시위 참여에 대해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심대섭 또한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종결 결정을 거쳐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고 8개월간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런 일제의 가혹한 처벌은 독립을 요구하는 식민지 청년의 기를 꺽어 다시는 독립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심대섭에게는 오히려 독립의 의지를 더욱 강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심대섭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천도교 서울대교구장 장기렴, 목사, 학생 등 9명과 함께 지냈다.

심대섭이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있는 동안 옥중에서 썼다는 <옥중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을 살펴보면, 당시 심대섭은 징역살이를 통해 오히려 독립투사로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옥중 서신은 1919년 8월 29일 한여름에 써서 어머니에게 몰래 보낸 글이다.

심대섭은 이 글에서 “오늘 아침에 차입해 주신 고의적삼을 받고서야 제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집에 와서 지냅니다” 라는 배짱 좋은 말로 아들을 걱정하고 있을 어머니의 심정을 위로하고 있다. 이어서 똥통이 끓을 정도로 더운 날씨와 밤이면 빈대, 벼룩이 살을 뜯어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을 만큼 생지옥 같은 감옥살이지만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라고 하여 함께 수형생활을 하는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 의지를 통해 독립운동의 올바름과 정당성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심대섭의 의지는 19세의 어린 나이로 감옥살이를 하며 겪었던 독립운동가 장기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더욱 굳혀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심대섭은 마지막으로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라는 말로 글을 끝내면서 자신의 삶은 앞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아 갈 것임을 다짐하고 있다.

이렇듯 심대섭에게 3.1혁명은 자신의 인생 역정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이정표를 세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독립운동과 감옥살이를 통한 경험은 이후 그의 문학정신의 바탕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통해 충분히 구현되었다.

그리고 심대섭은 마침내 1919년 11월 집행유예로 8개월여의 징역살이를 끝내고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가 다니던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는 이 사건을 이유로 심대섭을 퇴학시켰다. 경성고보에서 퇴학당한 심대섭이 선택한 것은 중국으로의 망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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