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역사문화연구소 김학로 소장

[당진신문=김학로 당진역사문화연구소장]

심대섭은 1919년 경성고보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열아홉 살 나이에 3.1혁명을 맞았다.  당시 경성고보 학생들은 김백평, 박노영, 박쾌인 등이 주도하여 3.1혁명에 대거 참여하였다. 심대섭도 다른 경성고보 학생들과 함께 고종의 국장연습이 끝난 이후에 파고다 공원으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파고다 공원에 모인 군중들은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 이후 조선독립을 외치는 만세를 부르며 경성시내로 터져 나왔다. 심대섭도 군중들을 따라 경성시내로 나와 대한문·창덕궁 앞을 지나 안국동으로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 시위는 연일 이어졌지만 심대섭은 몸이 아파 3월4일, 5일의 남대문 시위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후 3.1혁명으로 학교가 휴교하고, 일제 경찰에 의해 만세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심대섭은 친구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송현동의 청송여관에 들렸다가 체포되었다.

심대섭이 일제 경찰에 체포된 것을 3월5일이라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여러 가지 정황상 3월5일 보다는 6일 체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심대섭이 3월7일 진술한 것을 보면, 3월4일과 5일에는 몸이 아파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했으므로, 3월5일에는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신문조서를 작성한 날이 3월7일이니 6일 체포된 이후 바로 다음날부터 조사받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심대섭은 3월6일 체포되었고, 3월7일부터 본격적인 조사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렇듯 3월6일 일제 경찰에 체포된 심대섭은 3월7일 경무총감부에서 조선총독부 검사 산택좌일랑(山澤佐一郞)에게 신문을 받았다. 일제의 신문조서에 의하면, 심대섭은 1919년 3월1일 파고다공원과 대한문에서 만세를 부르고 집에 돌아갔다고 진술하였다. 6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계직무대리 조선총독부 판사 굴직희(堀直喜)가 묻는 질문에는 파고다공원에 가게 된 이유로 오후에 독립운동이 있을 것이라는 김백평의 연설을 듣고 참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독립운동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도 “지금 조선은 일본에 합병당하고 있으나, 일본으로부터 권리를 물려받아 조선인만으로 정치를 하도록하기 위해 일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나도 독립을 희망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심대섭의 진술 내용은 3.1혁명에 참여하였다 체포된 보통의 학생들이 진술한 내용과 대비된다. 단순 참여자들의 진술은 3.1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 우연한 계기로 참여하였다고 진술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심대섭의 진술은 매우 구체적이고 당당한 진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진술 태도는 심대섭이 3.1혁명에 가담했던 이유가 일시적이고 우연한 참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조선총독부 판사 굴직희(堀直喜)가 독립을 희망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해서도 “민족은 다른 민족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고 독립해 정치하는 것인데, 조선도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일가 단란하게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교육제도가 불완전한 까닭으로 조선인은 생존경쟁의 패자가 되어 마침내 일본인의 노예가 되게 되었다. 또 조선에 대한 정치는 무단정치로서 문관까지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조선인을 적대시하는 것이다. 또 동양척식회사 등을 설립하여 마치 영국이 인도에서 동인도주식회사와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 등, 기타 여러 가지 불평이 있으므로 독립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진술하였다. 

이상 심대섭의 진술을 살펴보면, 그의 사회의식과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엿 볼 수 있다. 심대섭의 독립의지와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은 국제적인 정세까지 파악하고 있을 만큼 뛰어났다. 여기에 문학적인 수사까지 구사하며 일제의 무도함을 지적하고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10대의 고등보통학생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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