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전설 23


이 인 화  / 편집위원, 민속지리학 박사,  충청남도문화재전문위원,  (사)당진향토문화연구소장



-송악면 한진리 한진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대진(大津)이라고 표기되어 있어「큰 나루」를 의미해 서역항을 가는 주요교통로요, 당진군내에서는 제일가는 어항이었다.

전설에 이토정과 관련한 한진터진 이야기가 많이 회자되고 있고 한진 앞바다에 있는 영웅바위는 임진왜란시 왜군을 물리친 이야기와 함께 많은 전설들이 전해 오는 곳이다.

풍어제가 끊임없이 이어오고 있고 일제시대와 광복이후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까지 똑대기선이 다니던 주항로였다. 지금은 당진항과 황해안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어 급변한 변화가 일고 있는 곳이다.-





송악면 한진리 한진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대진(大津)이라고 표기되어 있어「큰 나루」를 의미해 서역항을 가는 주요교통로요, 당진군내에서는 제일가는 어항이었다. 한진 1구는 6.25 당시 실향민들이 많이 들어 와서 살았다.


주로 평안도 사람으로 이 지역 주민의 50%를 차지했다. 어업의 전성기에는 100여 척의 어선이 원근해에서 연중 조업하여 어민들의 생활이 풍요로웠으며, 해상교통의 오지로서 인천을 왕래하는 여객선이 매일 운항하였다.


작은 나룻배로는 아산만을 건너 경기도 평택군 포승면 만우리를 정기적으로 왕래하여 경기도와의 왕래도 편리하였고, 내륙 지방도 아산만과 삽교천을 이용하여 소들강문, 아산, 예산 등지의 수상 교통도 편리하였다.


이러한 교통수단을 이용 상인들도 지방의 토산물을 인천 서울에 공급하고 돌아올 때는 공산품인 일용잡화 및 의류 등 농어촌에 필요한 상품을 보급하였다. 이와 같이 모든 생활 수단이 활발해지면서 정기적인 장이 서게 되고 장이 서면서 한진의 생활은 더욱 풍요로웠다.

그러나 육상 교통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 후반에는 수상 교통이 쇠퇴하고 한진장도 폐지되고 말았다. 그 위에 1970년대 이후부터는 각처의 간척 사업으로 어업이 부진하여 주민의 생활이 어려워졌다.


최근에는 서해안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주위에 해안에는 모두 공단이 조성되어 대대손손(代代孫孫) 수백 년 동안 어업에 종사하던 주민은 어업권을 상실하였으나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았고, 바로 이웃인 부곡리(富谷里)에 부곡공단, 고대리(古垈里)에 고대공단 및 현대철강이 조성되어 눈부시게 변화하고 있다.
‘영웅바위 전설’, ‘용충’, ‘연평도 조기관련 전설’ 등이 전한다.


용 충

1996년만 해도 송악면 한진리 한진포구에 가려면 부곡리를 지나 당도하는 골갯골이 있었다. 그 골짜기에 용충이 있었고 그 골짜기 앞산이 소머리산이었다.


송악면 한진리 2구 304번지 김희수에 의하면 우리 할아버지 12살 때 부곡리 글방을 다녀오다 한 더위에 멱을 감으러 용충에 갔었다 한다. 용충 둠벙이 메방석둘레 만큼 한없이 빠지는 곳으로 헤엄치듯 다니면서 마실을 잡았다.

마실이 큰 것이 많아 위험을 무릅쓰고 다니는데 그날은
“애이, 목욕이나 해야겠다.”
하며 옷을 벗으려 하니 용충에서 절구통만한 크기의 시커먼 것이 쑥 나와 있더란다.

그래
“애, 빨리 나와!”
하고 소리를 쳤다. 거기 용충에서 좽이질을 해보면 멧방석만큼 큰 곳이 두 곳 있었는데 좽이가 들어가면 끝이 안 닿아 그 속에 좽이가 쏙 들어가면 꺼내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용충이 2m 정도 경사진 곳으로 겨 오르려면 미끄러지고 미끄러져
저 쪽으로 가라고 소리소리 쳐서 나왔다. 나와 보니 손톱에 흙이 절반이나 끼는 등 죽을 뻔했다고 한다.
1945년 8.15 해방직후 용충 앞에 제방을 쌓아 그 제방이 한진포구에 들어가는 진입로가 되었다. 지금은 그 갯골이 완전 사라지고 공장이 들어서 형체조차 찾을 수 없다.


황금산 황룡과 강활용

황해안에는 청룡과 황룡이 살았다. 황해안의 황금산에는 황룡이 살았고 연평도에는 청룡이 살았는데 연평도는 조기가 많고 이곳은 조기가 많지 않아 조기를 몰아오려던 옛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마을 독곶에 사는 강활용은 참으로 화살을 잘 쏘았다. 황금산 황룡이 꿈속에 나타나
“연평 조기를 가져 와야 하는데 연평의 청룡이 조기를 뺏기지 않으려고 한다.내가 청룡을 이겨야만 그 조기를 다 가져 올 텐데. 도리가 없어. 그대가 활을 잘 쏘니, 그 놈하고 싸움을 할 때 그 놈이 몸을 뒤틀거든 내게다 화살을 쏴라. 그러면 그 순간 나는 그 밑으로 가 청룡이 맞을 게다. 꼭 내게다 쏴다오.??


황룡은 독곳에 사는 강씨한테 단단히 부탁을 하였다. 강활용이 꿈을 깨 생각하다가 다음날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 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황룡과 청룡이 싸우고 있었다. 차마 황룡에게 화살을 쏠 수가 없어 그냥 돌아왔다.


그 날 저녁 또 꿈에 나타나
“어찌 왔다가 그냥 갔느냐?"
“명일 다시 싸움이 있을 테니 틀림없이 내게 활을 쏴 다오. 그 대신 그대 소원을 내가 풀어주마.”
다음날 또 나가 보니 또 싸우고 있었다. 강활용은 차마 내 지방에 있는 황룡에게 활을 쏠 수 없어 청룡에게가 쏘았다. 그 순간 청룡은 밑으로 가고 황룡이 덜컥 맞았다.


그 날 저녁 황룡이 나타나
“나는 이미 죽었으니 내가 여기다 손을 하나 두고 간다. 그러니 그리로 오너라. 그대 얼굴이나 대면 해보고 죽고자."


그래 다음날 나갔더니 황룡의 목숨이 아직 살아 있었던지 냅다 서기(瑞氣)가 비춰 강씨 눈이 멀었다.
그날 저녁 황룡이 또 나타나
“이 앞 용충에 가서 물을 푸면 잉어 새끼가 있다. 그걸 잡아서 그 쓸개를 눈에다 넣어라. 넣으면 해태가 벗겨진다."


그런데 그 용충은 말리려고 해도 말릴 수 없는 용천임에도 불구하고 그 곳을 품어 잉어를 잡아 쓸개를 눈에다 넣어 나았다.
그래 조기가 연평도만 있고 이곳에는 없다고 전해온다.


토정선생과 한진 터진 이야기

아산만에 가보면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원래 그곳이 육지로 그곳이 집터였었다. 그 곳에 집 한 채가 있고 그 바위 위가 장독대로 그 토정 선생이 그 일대 산을 올라가서 쭈욱 지리를 살펴보니 아무 날 몇 시쯤 육지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 현감을 불러
“여기가 터질 것 같으니 다들 피신을 시켜야 되겠습니다.”


하였다. 토정은 워낙 유명해 그가 예감한 거라 너나할 것 없이 모두들 얼른 피신했다. 토정도 주위를 돌아다보며 자기도 빨리 피신하려고 하였는데 새우젓 장사 한사람이 독을 지고 천천히 가더란다.

그래서
“당신은 한진이 터진다는 소문 못 들었어?” 하니 “안다고.” 하더란다.
“근데 빨리 안가고 그렇게 꾸물거리느냐?” 하니
“알았다고.”
그러면서도 천천히 가더란다.

시간이 촉박해 이 사람은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부지런히 뛰어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터질 시간을 기다리고 있노라니까, 이 사람은 저기 마치 중간에서 작대기를 받쳐 놓고 그 밑에 앉아 낮잠을 자고 있더란다.


시간이 얼마만큼 지났을까 땅이 갈라져 다 떠나갔는데 그 사람이 작대기를 받쳐놓은 앞까지만 터졌더란다.
그래서 토정선생이 그 사람 앞에서 꼼짝을 못했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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