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의 인물들 4>

박 철 준 (朴哲濬)  / (예) 공군대령

약 력
- 충남 당진군 송산면 출생
- 경남대 정치외교학(서울) 박사과정
- 합동참모본부 작전참모부 연합/합동작전담당
- 한미연합사 미사일방어처장
- 한미동맹기념관 추진위원





최근 여러 가지 모양으로 혼란스런 정국이다. 또한 당진군민들의 의식과 생활사, 담록(淡綠)들을 종합해 보면 흡사 조선 선조때와 흡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외교정책 및 국정의 혼란속에서 이번 정부는 왜 이렇게도 무능한가? 당진에는 그렇게도 인물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율곡 이이를 아십니까?”하고 물으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토정 이지함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학문을 논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스승 같은 벗으로 대하며 존중했던 인물이 ‘구봉 송익필’이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한 이지함의 수제자 고청으로부터 ‘살아있는 제갈공명’이라 극찬까지 받았던 인물이 당진에 묻혀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조선을 통틀어 유가(儒家)에서 가장 내공이 높았던 인물은 송익필, 구봉 선생으로 설정되어 있다.

당대 제도권에서는 다른 평가를 할 수도 있겠으나, 민초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평가에 의하면 송구봉은 강단(講壇)이 아닌 강호유학(江湖儒學)의 최고봉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당대의 석학 이이(李珥 1536~1584), 성혼(成渾 1535~1598), 정철(鄭澈 1536~1593) 등과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전해지는 숨겨진 인물이다.


그러나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출신상의 비천한 신분이 문제가 되어 당시 역사무대에서 활동이 봉쇄되었던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인 선조를 비롯하여 주변을 싸고 있던 조정의 관료들이 너무 무능하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제1부 송익필은 누구인가?


살아있는 제갈공명이라 불렸던 송익필

송익필 선생은 1534년(중종29년)에 당상관(정3품이상) 송사련과 연일 정씨 사이에 4남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운장(雲長)이며,호는 구봉(龜峯) 또는 현승(玄繩)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에서 출생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호로 쓴 ‘구봉(龜峰)’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는 고양에서 오랫동안 거주했기에 그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있다.


송익필 선생은 현 파주시 교하면 산남리 심악산 아래 궁동에서 성장하였으며 선생을 잉태 후 심악산에 나무들이 고갈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유학의 정치역사에서 세조~중종까지 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훈구파들이 거의 물러나고, 사림파 유학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던 시대였으며, 당쟁의 분열로 동인, 서인, 남인, 북인으로 분열되기 시작하던 혼란기였다.


그는 천부적으로 머리가 아주 우수하여 7세에 이미 붓을 잡고 뛰어난 시문을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산가모옥월참차(山家茅屋月參差 : 산 속 초가집에 달빛이 어른거리네)’ 라는 싯구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서출(庶出)로서 벼슬을 하지 못하였으나 성리학에 통달했고 예학(禮學)과 문장에 뛰어났다.


20대에 이미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입, 이순인, 윤탁연, 하응임 (李山海, 崔慶昌, 白光弘, 崔笠, 李純仁, 尹卓然, 河應臨)등과 함께 8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당시 현 고양시 송포동 구봉산 기슭에서 후진을 양성 문하생 중 김장생, 김 집, 정 엽, 서 성, 정홍명, 김 반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중에서 특히 金長生이 그의 예학을 이어받아 대가가 되었다.


그는 일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 책을 보고 이치를 깨우쳐 나갔다. 젊은 나이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당대 최고 문장가들과 시를 짓고 품평을 했으며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송강 정철 등과 교유하며 정치경륜과 학문에 관해 깊은 토론을 하며 자신의 학문을 완성해 나간다.


송익필 묘비

송익필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
임진왜란 당시 최고의 충의지사로 ‘조헌과 칠백의총’의 주인공인 조헌(趙憲 1544~1592, 조선 후기의 의병장)으로서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조선중기 정치가)과 김집(金集 1574년~1656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부자(父子) 또한 그로부터 학문을 배워 조선후기 예학을 집대성하여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김장생-김집은 이율곡과 송구봉 모두를 스승으로 모셨다.
이후 이들 부자는, 조선후기 성리학을 완전히 뿌리내리며 송자(宋子)라고도 불렸던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의 스승이 된다.


그러나 그는 신분차별이 엄격하였던 조선중엽에 태어나 종의 자손이라는 신분상의 문제와 동인들의 방해로 끝내 정계에 진출하지는 못하였다.
<다음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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